`가상공장`서 상품 성능검증… R&D의 최전선
자동차ㆍ반도체 등 세계1등 기업들과 동반성장
NASA 우주선 개발 적용후 전 산업분야 확산
외산SW 시장서 국산화 성공… 해외수출까지
자동차ㆍ반도체 등 세계1등 기업들과 동반성장
NASA 우주선 개발 적용후 전 산업분야 확산
외산SW 시장서 국산화 성공… 해외수출까지
■ 스타트C 코리아
1부-과학ㆍICT 융합빅뱅
(8) 산업현장에 `가상공장`혁신 가져온 SW
미 항공우주국(NASA)이 지난해 8월 화성에 보낸 화성탐사로봇 `큐리오시티'에는 인류가 살 만한 지구밖 행성을 찾으려는 염원이 담겼다. 화성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기 위한 이 로봇 제작에는 25억달러(2조8000억원)가 넘는 돈이 들었다.
그런데 컴퓨터지원공학(CAE) SW가 없었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었을 것이다. 로봇은 첨단기술을 결집한 데다 우주공간에서 최고 1500도, 화성에서는 하루에도 50도에서 영하 135도를 오가는 온도를 견뎌야 한다.
단 하나의 에러만 있어도 2조8000억원이 날아가지만 지구에서 우주와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 테스트를 하기도 힘든 일. 연구진은 대신 컴퓨터 안에 가상의 우주선과 로봇을 만들어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이 CAE SW다. CAE는 상품 기획ㆍ개발 과정에서컴퓨터를 이용해 가상공간에서 물건을 만들고 구동까지 하는 기술. 컴퓨터 성능이 폭발적으로 향상되고 물리, 화학 관련 지식이 정교해진 데다 컴퓨터지원설계(CAD)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기업들이 이전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적기에 제품을 내놓도록 돕는 핵심 도구로 자리잡았다.
CAE가 가장 먼저 적용된 곳은 거대과학 분야로 분류되는 우주개발 영역. 우주선은 실제 딱 한번밖에 발사할 수 없어 이전에 컴퓨터로 수십만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실패 확률을 없애야 한다. NASA가 우주선을 만들기 위해 개발한 이 기술이 이제 반도체, 항공, 자동차, 조선 등 전 산업분야에 파고들어 기술혁신을 이끌고 있다.
세계 1등 산업 키우는 국산 CAE SW
이성윤 에스앤위즈 대표는 연세대 학내 벤처에 몸담고 있던 2003년 일본 도요타자동차로부터 50만달러의 돈과 함께 `자동차 엔진 본체 두께를 4∼5㎜에서 2㎜로 얇게 하는 데 필요한 CAE SW를 개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경량화를 위해 필요하지만 당시 상용 SW로는 불가능했던 기능을 벤처에 요청한 것.
이 대표는 이후 2007년 에스앤위즈를 창업해 세계 1등 하는 국내 기업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과거 CAE는 상품설계 후 컴퓨터로 검증하는 과정에 주로 쓰였지만 최근에는 상품 기획과 설계 앞 단계에서 상품을 컴퓨터 속 `가상공장'에서 미리 만들어서 구동까지 해보는, 연구개발(R&D) 최전선에 자리잡았다.
에스앤위즈는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기아차, 제너럴일렉트릭, 포스코, LG디스플레이 등 세계 1등 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제품 기획단계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자리잡았다. 국내 대부분의 냉장고와 자동차 내장재가 이 회사 SW를 거쳐 만들어지고 제철사의 연속주조 공정, 디스플레이 회사의 방열설계에도 적용된다.
이 대표는 "운좋게도 국내 대표 기업들이 필요한 기술을 먼저 제안해와 공조하면서 서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며 "국내 기업들이 세계 1등으로 속속 올라서면서 과거에는 니싼에 SW를 판 경험이 있다고 설명하면 현대차에서 사던 것에서, 현대차가 SW를 채택했다고 하면 외국기업들이 관심을 보인다"고 말했다.
거대과학 노하우 반도체에 접목
경원테크는 1998년 설립 이후 외산 CAE SW를 수입해 팔다가 국산화로 돌아섰다. 이 회사는 반도체 핵심 제조공정인 식각과 증착공정을 시뮬레이션하는 SW `K스피드'를 개발해 올해 삼성전자에 공급했다. 이 SW는 반도체 공정에서 쓰이는 복합가스의 반응을 정확하게 계산해줘 반도체 업체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제품을 만들게 해준다. 그래픽처리장치(GPU) 병렬처리 기능을 적용, 기존 단일 중앙처리장치(CPU)를 이용한 것보다 계산시간도 100분의 1 이상 단축시켰다.
서광원 경원테크 대표는 "외산SW 유통회사들은 본사가 합병되면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며 "한국이 세계 최고인 시장에서 SW를 자체 개발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4년이 걸린 긴 개발과정에는 국내 대표적인 연구기관과 대학교수들이 힘을 모았다. 핵융합 연구에서 플라즈마 관련 데이터를 확보한 국가핵융합연구소를 비롯, 표준과학연구원, 전북대, 부산대 연구진과 팀을 꾸린 것. 전북대와 부산대는 기존 외산제품 고객이었고, 표준연은 과제를 두고 경쟁하던 관계였는데 함께 개발하는 파트너로 바뀌었다.
기업이 제품 개발과정에서 반도체 라인을 실제로 한번 돌리려면 수백억에서 수천억원의 돈이 든다. SW는 이 과정을 가상공장으로 대체해 준다. 컴퓨터 성능향상이 무엇보다 든든한 성장배경이다.
서 대표는 "과거에는 컴퓨터 성능이 좋지 않아 플라즈마 해석에 한달 가까이 걸렸지만 요즘은 하루면 끝난다"고 말했다. 이성윤 대표 역시 "고객이 문제를 갖고 오면 대부분 20분이면 해석이 마무리된다"고 밝혔다.
연 6000억 시장 95%는 외산…국산 틈새기업들 성장
이들 기업은 외산 일색이던 CAE 시장에서 기술력으로 승부해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패키지 SW 시장이 열악하고 제조산업 역시 해외기술 의존도가 높아 과거에는 거의 외산제품 일색이었다.
그러다 세계 1위로 올라선 기업들이 해외 정보유출 위험이 적고 긴밀한 협력이 가능한 국산제품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최근 시장이 커지고 있다.
피도텍은 CAE SW의 해석 데이터를 이용해 실제 제품을 설계하는 다분야 통합설계툴을 공급한다. 오늘의 피도텍을 있게 한 건 정부 R&D 과제였다. 외산제품 일색이던 1999년 정부가 CAE 기반 설계툴을 국산화하자는 목표로 R&D센터를 만들고 9년간 100억원을 지원한 것.
당시 개발된 기술을 이전받아 2003년 회사를 설립한 후 5년간의 R&D를 거쳐 2008년부터 툴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미국, 유럽 기업이 주도하는 이 시장에서 아시아 기업이 툴을 내놓은 것은 피도텍이 1호다. 7개 대학, 17명의 교수가 모여 기술을 개발한 만큼 경쟁력도 높다. 국내 CAE 분야 중 외산 대체율이 가장 높은 영역이다. 소문이 나면서 미국, 유럽 기업이 회사 인수를 제의해 오기도 한다.
윤상준 피도텍 이사는 "상품을 내놓던 2008년까지만 해도 외산제품을 쓰던 현대자동차가 이제 우리 SW만 쓴다"며 "현대차 외에 쌍용, GM대우 등 자동차 4사, 삼성전자, 삼성전기, 현대모비스가 주요 고객사"라고 밝혔다.
브이엠테크는 플라스틱을 원료로 하는 모든 상품 개발에 쓰이는 사출성형 해석에 특화했다. 삼성전자에서 CAE SW를 개발하던 팀이 1999년 전문 벤처를 설립해 독립해 나온 게 출발이었다.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예를 들면 플라스틱 재료와 공정 조건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실제같이 해석해 어떤 문제가 생길 지를 미리 알려준다. 삼성전자, 제일모직를 비롯, 가전업체, 자동차 협력사들이 주요 고객이다.
국산 플라스틱 CAE SW를 판매하는 곳은 이 회사가 유일하다. 세계적으로도 6∼7개에 그친다. 그만큼 경쟁해볼 만한 시장이다.
표병기 브이엠테크 이사는 "이전에 플라스틱 사출SW는 일본이 세계 최대 시장이었는데 최근 우리나라로 넘어오는 추세"라며 "성능과 기술력에서 뒤지지 않는 만큼 국내 산업의 강점을 활용하면 충분히 대결할 만하다고 자신한다"고 밝혔다.
코드에스이는 CAE SW회사들이 보다 편리하게 SW를 개발하도록 툴을 공급한다. 2007년 창업한 이 회사는 2010년 제품을 상용화하고 작년부터 시장에 본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표준화ㆍ구조화ㆍ자동화된 개발툴을 통해 기업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SW를 개발하도록 돕는다. 특히 이 툴은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경쟁제품이 1∼2개밖에 없을 정도로 차별화된다.
정병수 코드에스이 이사는 "외산 제품 몇 개를 합해야 우리 제품과 기능이 비슷하다"며 "외산 개발툴 회사들은 툴로 SW를 개발한 기업들에 매출액 대비 일정 퍼센트를 로열티로 내도록 하는 등 유지비용이 비싼데 우리는 가격 경쟁력도 높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현대자동차, 삼성디스플레이 등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함께 성장하는 동반성장 파트너로
이들 기업은 과거에 없던 틈새 SW와 탄탄한 기술력으로 대기업들과 `갑을'이 아닌 `협력' 파트너로 활약한다. 모두 국내 내노라할 대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있고, 대기업의 인수제의나 독점공급 제의를 종종 받기도 한다.
제조기업들도 최근 자동차, 스마트폰 등 신제품 출시 주기가 짧아지면서 CAE를 R&D 과정의 가장 앞단에 배치하고 상품 기획 단계부터 활용하다 보니 빠른 대응과 협력이 가능한 국내 기업을 선호한다.
CAE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각각 다른 영역을 커버하고 있는 이들 기업은 `전산수치 해석 클러스터'라는 모임을 만들고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매월 모임을 갖고 시장과 제품 정보를 주고받는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상에서 이들 솔루션을 쓸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이면서 이들 기업을 지원하고 협력한다.
윤상준 이사는 "국내 패키지SW 분야는 가격이 저평가돼 있고, 외산을 쓰는 게 당연시돼 우리같이 기술과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벤처가 살아남기 힘든 생태계"라며 "서로 아이디어와 정보를 주고받고 산업에 대한 발언권도 갖기 위해 모임을 만들고 고객과 시장정보를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시장이 겹치지 않다 보니 한 회사가 이미 개발한 기술은 다른 회사가 따로 개발하지 않고 채택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이 크다"고 말했다.
패키지SW 자생 환경 필요
이날 모임에 참석한 업체 대표들은 CAE가 산업 현장의 핵심 뿌리 기술로 자리잡아가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산업 생태계와 정부 관심이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특히 SW 산업 내에서도 일부에 정부 지원과 개발 인력이 쏠리면서 CAE 같은 패키지 SW기업들이 자생할 수 있는 여건이 취약하다는 지적이다.
서광원 대표는 "대기업의 상품 생산에 필요한 임베디드SW나 게임, 네트워크 분야에 산업이 집중된 것이 문제"라며 "자생할 수 있는 패키지 SW가 없다 보니 용역 위주의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임베디드SW는 국비 지원 무료 교육과 기업 연수수당 지급 등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며 "CAE 분야에서도 개발 능력을 갖춘 기업체를 지원해 교육을 하도록 함으로써 인력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병수 이사는 "고급 SW 엔지니어가 살아남으려면 패키지 SW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SW는 하드웨어와 달리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면서 가치가 높아가는 만큼 유지보수 및 업그레이드 예산을 제대로 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 R&D 과제에 기업이 산학연 협력이 아닌 독자적으로도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과제가 주로 학교나 연구소 중심으로 채택돼 전문성 있는 벤처 기업들의 설자리가 부족하다는 것.
서 대표는 "R&D 과제 선정 기준도 회사 규모나 매출액 위주다 보니 젊은이들이 창업다운 창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라며 "정부 R&D 포트폴리오에서 기업 역할을 넓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병수 이사는 "CAE는 일종의 기반산업인데, 관련 산업분류가 제대로 안 돼 있고 신경 쓰는 부처와 국가연구소도 찾기 힘들다. 산업과 연계돼 있다 보니 하드웨어와 같이 취급하기도 한다"며 "정부가 이 분야에서 어떤 시장이 존재하는지 보여주고 지원해줘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성윤 에스앤위즈 대표는 "외산SW는 제대로 돈주고 사면서 국산은 테스트용으로 준 트라이얼제품으로 쓰려고 하는 등 국산을 차별하는 경우가 많다"며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안경애차장 naturean@, 이준기기자 bongchu@, 허우영기자 yenny@, 남도영기자 namdo0@
1부-과학ㆍICT 융합빅뱅
(8) 산업현장에 `가상공장`혁신 가져온 SW
미 항공우주국(NASA)이 지난해 8월 화성에 보낸 화성탐사로봇 `큐리오시티'에는 인류가 살 만한 지구밖 행성을 찾으려는 염원이 담겼다. 화성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기 위한 이 로봇 제작에는 25억달러(2조8000억원)가 넘는 돈이 들었다.
그런데 컴퓨터지원공학(CAE) SW가 없었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었을 것이다. 로봇은 첨단기술을 결집한 데다 우주공간에서 최고 1500도, 화성에서는 하루에도 50도에서 영하 135도를 오가는 온도를 견뎌야 한다.
단 하나의 에러만 있어도 2조8000억원이 날아가지만 지구에서 우주와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 테스트를 하기도 힘든 일. 연구진은 대신 컴퓨터 안에 가상의 우주선과 로봇을 만들어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이 CAE SW다. CAE는 상품 기획ㆍ개발 과정에서컴퓨터를 이용해 가상공간에서 물건을 만들고 구동까지 하는 기술. 컴퓨터 성능이 폭발적으로 향상되고 물리, 화학 관련 지식이 정교해진 데다 컴퓨터지원설계(CAD)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기업들이 이전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적기에 제품을 내놓도록 돕는 핵심 도구로 자리잡았다.
CAE가 가장 먼저 적용된 곳은 거대과학 분야로 분류되는 우주개발 영역. 우주선은 실제 딱 한번밖에 발사할 수 없어 이전에 컴퓨터로 수십만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실패 확률을 없애야 한다. NASA가 우주선을 만들기 위해 개발한 이 기술이 이제 반도체, 항공, 자동차, 조선 등 전 산업분야에 파고들어 기술혁신을 이끌고 있다.
세계 1등 산업 키우는 국산 CAE SW
이성윤 에스앤위즈 대표는 연세대 학내 벤처에 몸담고 있던 2003년 일본 도요타자동차로부터 50만달러의 돈과 함께 `자동차 엔진 본체 두께를 4∼5㎜에서 2㎜로 얇게 하는 데 필요한 CAE SW를 개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경량화를 위해 필요하지만 당시 상용 SW로는 불가능했던 기능을 벤처에 요청한 것.
이 대표는 이후 2007년 에스앤위즈를 창업해 세계 1등 하는 국내 기업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과거 CAE는 상품설계 후 컴퓨터로 검증하는 과정에 주로 쓰였지만 최근에는 상품 기획과 설계 앞 단계에서 상품을 컴퓨터 속 `가상공장'에서 미리 만들어서 구동까지 해보는, 연구개발(R&D) 최전선에 자리잡았다.
에스앤위즈는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기아차, 제너럴일렉트릭, 포스코, LG디스플레이 등 세계 1등 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제품 기획단계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자리잡았다. 국내 대부분의 냉장고와 자동차 내장재가 이 회사 SW를 거쳐 만들어지고 제철사의 연속주조 공정, 디스플레이 회사의 방열설계에도 적용된다.
이 대표는 "운좋게도 국내 대표 기업들이 필요한 기술을 먼저 제안해와 공조하면서 서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며 "국내 기업들이 세계 1등으로 속속 올라서면서 과거에는 니싼에 SW를 판 경험이 있다고 설명하면 현대차에서 사던 것에서, 현대차가 SW를 채택했다고 하면 외국기업들이 관심을 보인다"고 말했다.
거대과학 노하우 반도체에 접목
경원테크는 1998년 설립 이후 외산 CAE SW를 수입해 팔다가 국산화로 돌아섰다. 이 회사는 반도체 핵심 제조공정인 식각과 증착공정을 시뮬레이션하는 SW `K스피드'를 개발해 올해 삼성전자에 공급했다. 이 SW는 반도체 공정에서 쓰이는 복합가스의 반응을 정확하게 계산해줘 반도체 업체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제품을 만들게 해준다. 그래픽처리장치(GPU) 병렬처리 기능을 적용, 기존 단일 중앙처리장치(CPU)를 이용한 것보다 계산시간도 100분의 1 이상 단축시켰다.
서광원 경원테크 대표는 "외산SW 유통회사들은 본사가 합병되면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며 "한국이 세계 최고인 시장에서 SW를 자체 개발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4년이 걸린 긴 개발과정에는 국내 대표적인 연구기관과 대학교수들이 힘을 모았다. 핵융합 연구에서 플라즈마 관련 데이터를 확보한 국가핵융합연구소를 비롯, 표준과학연구원, 전북대, 부산대 연구진과 팀을 꾸린 것. 전북대와 부산대는 기존 외산제품 고객이었고, 표준연은 과제를 두고 경쟁하던 관계였는데 함께 개발하는 파트너로 바뀌었다.
기업이 제품 개발과정에서 반도체 라인을 실제로 한번 돌리려면 수백억에서 수천억원의 돈이 든다. SW는 이 과정을 가상공장으로 대체해 준다. 컴퓨터 성능향상이 무엇보다 든든한 성장배경이다.
서 대표는 "과거에는 컴퓨터 성능이 좋지 않아 플라즈마 해석에 한달 가까이 걸렸지만 요즘은 하루면 끝난다"고 말했다. 이성윤 대표 역시 "고객이 문제를 갖고 오면 대부분 20분이면 해석이 마무리된다"고 밝혔다.
연 6000억 시장 95%는 외산…국산 틈새기업들 성장
이들 기업은 외산 일색이던 CAE 시장에서 기술력으로 승부해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패키지 SW 시장이 열악하고 제조산업 역시 해외기술 의존도가 높아 과거에는 거의 외산제품 일색이었다.
그러다 세계 1위로 올라선 기업들이 해외 정보유출 위험이 적고 긴밀한 협력이 가능한 국산제품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최근 시장이 커지고 있다.
피도텍은 CAE SW의 해석 데이터를 이용해 실제 제품을 설계하는 다분야 통합설계툴을 공급한다. 오늘의 피도텍을 있게 한 건 정부 R&D 과제였다. 외산제품 일색이던 1999년 정부가 CAE 기반 설계툴을 국산화하자는 목표로 R&D센터를 만들고 9년간 100억원을 지원한 것.
당시 개발된 기술을 이전받아 2003년 회사를 설립한 후 5년간의 R&D를 거쳐 2008년부터 툴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미국, 유럽 기업이 주도하는 이 시장에서 아시아 기업이 툴을 내놓은 것은 피도텍이 1호다. 7개 대학, 17명의 교수가 모여 기술을 개발한 만큼 경쟁력도 높다. 국내 CAE 분야 중 외산 대체율이 가장 높은 영역이다. 소문이 나면서 미국, 유럽 기업이 회사 인수를 제의해 오기도 한다.
윤상준 피도텍 이사는 "상품을 내놓던 2008년까지만 해도 외산제품을 쓰던 현대자동차가 이제 우리 SW만 쓴다"며 "현대차 외에 쌍용, GM대우 등 자동차 4사, 삼성전자, 삼성전기, 현대모비스가 주요 고객사"라고 밝혔다.
브이엠테크는 플라스틱을 원료로 하는 모든 상품 개발에 쓰이는 사출성형 해석에 특화했다. 삼성전자에서 CAE SW를 개발하던 팀이 1999년 전문 벤처를 설립해 독립해 나온 게 출발이었다.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예를 들면 플라스틱 재료와 공정 조건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실제같이 해석해 어떤 문제가 생길 지를 미리 알려준다. 삼성전자, 제일모직를 비롯, 가전업체, 자동차 협력사들이 주요 고객이다.
국산 플라스틱 CAE SW를 판매하는 곳은 이 회사가 유일하다. 세계적으로도 6∼7개에 그친다. 그만큼 경쟁해볼 만한 시장이다.
표병기 브이엠테크 이사는 "이전에 플라스틱 사출SW는 일본이 세계 최대 시장이었는데 최근 우리나라로 넘어오는 추세"라며 "성능과 기술력에서 뒤지지 않는 만큼 국내 산업의 강점을 활용하면 충분히 대결할 만하다고 자신한다"고 밝혔다.
코드에스이는 CAE SW회사들이 보다 편리하게 SW를 개발하도록 툴을 공급한다. 2007년 창업한 이 회사는 2010년 제품을 상용화하고 작년부터 시장에 본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표준화ㆍ구조화ㆍ자동화된 개발툴을 통해 기업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SW를 개발하도록 돕는다. 특히 이 툴은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경쟁제품이 1∼2개밖에 없을 정도로 차별화된다.
정병수 코드에스이 이사는 "외산 제품 몇 개를 합해야 우리 제품과 기능이 비슷하다"며 "외산 개발툴 회사들은 툴로 SW를 개발한 기업들에 매출액 대비 일정 퍼센트를 로열티로 내도록 하는 등 유지비용이 비싼데 우리는 가격 경쟁력도 높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현대자동차, 삼성디스플레이 등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함께 성장하는 동반성장 파트너로
이들 기업은 과거에 없던 틈새 SW와 탄탄한 기술력으로 대기업들과 `갑을'이 아닌 `협력' 파트너로 활약한다. 모두 국내 내노라할 대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있고, 대기업의 인수제의나 독점공급 제의를 종종 받기도 한다.
제조기업들도 최근 자동차, 스마트폰 등 신제품 출시 주기가 짧아지면서 CAE를 R&D 과정의 가장 앞단에 배치하고 상품 기획 단계부터 활용하다 보니 빠른 대응과 협력이 가능한 국내 기업을 선호한다.
CAE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각각 다른 영역을 커버하고 있는 이들 기업은 `전산수치 해석 클러스터'라는 모임을 만들고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매월 모임을 갖고 시장과 제품 정보를 주고받는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상에서 이들 솔루션을 쓸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이면서 이들 기업을 지원하고 협력한다.
윤상준 이사는 "국내 패키지SW 분야는 가격이 저평가돼 있고, 외산을 쓰는 게 당연시돼 우리같이 기술과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벤처가 살아남기 힘든 생태계"라며 "서로 아이디어와 정보를 주고받고 산업에 대한 발언권도 갖기 위해 모임을 만들고 고객과 시장정보를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시장이 겹치지 않다 보니 한 회사가 이미 개발한 기술은 다른 회사가 따로 개발하지 않고 채택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이 크다"고 말했다.
패키지SW 자생 환경 필요
이날 모임에 참석한 업체 대표들은 CAE가 산업 현장의 핵심 뿌리 기술로 자리잡아가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산업 생태계와 정부 관심이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특히 SW 산업 내에서도 일부에 정부 지원과 개발 인력이 쏠리면서 CAE 같은 패키지 SW기업들이 자생할 수 있는 여건이 취약하다는 지적이다.
서광원 대표는 "대기업의 상품 생산에 필요한 임베디드SW나 게임, 네트워크 분야에 산업이 집중된 것이 문제"라며 "자생할 수 있는 패키지 SW가 없다 보니 용역 위주의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임베디드SW는 국비 지원 무료 교육과 기업 연수수당 지급 등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며 "CAE 분야에서도 개발 능력을 갖춘 기업체를 지원해 교육을 하도록 함으로써 인력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병수 이사는 "고급 SW 엔지니어가 살아남으려면 패키지 SW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SW는 하드웨어와 달리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면서 가치가 높아가는 만큼 유지보수 및 업그레이드 예산을 제대로 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 R&D 과제에 기업이 산학연 협력이 아닌 독자적으로도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과제가 주로 학교나 연구소 중심으로 채택돼 전문성 있는 벤처 기업들의 설자리가 부족하다는 것.
서 대표는 "R&D 과제 선정 기준도 회사 규모나 매출액 위주다 보니 젊은이들이 창업다운 창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라며 "정부 R&D 포트폴리오에서 기업 역할을 넓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병수 이사는 "CAE는 일종의 기반산업인데, 관련 산업분류가 제대로 안 돼 있고 신경 쓰는 부처와 국가연구소도 찾기 힘들다. 산업과 연계돼 있다 보니 하드웨어와 같이 취급하기도 한다"며 "정부가 이 분야에서 어떤 시장이 존재하는지 보여주고 지원해줘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성윤 에스앤위즈 대표는 "외산SW는 제대로 돈주고 사면서 국산은 테스트용으로 준 트라이얼제품으로 쓰려고 하는 등 국산을 차별하는 경우가 많다"며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안경애차장 naturean@, 이준기기자 bongchu@, 허우영기자 yenny@, 남도영기자 namd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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