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금 17억인 현대차, 280억 추정 고유모델 개발 '과감한 결정'
이탈리아·일본·영국 등 다국적 기술 총동원 '포니프로젝트' 결실
최근 국내 자동차산업 위상 하락…공격적투자 통해 미래 준비를
이탈리아·일본·영국 등 다국적 기술 총동원 '포니프로젝트' 결실
최근 국내 자동차산업 위상 하락…공격적투자 통해 미래 준비를
■기술로 이룬 70년 성장신화
(9) 첫 고유모델 자동차 '포니'의 탄생
"고유모델 개발을 시작하라고 했지만 막상 부품을 도면으로 그리는 방법조차 몰랐다. 더구나 당시 한국에는 도면을 줘도 만들 수 있는 곳도 없었다."
대한민국 최초 고유모델인 '포니'를 시작으로 엑셀, 프레스토, 엑센트, 엘란트라, 아반떼, 마르샤, 쏘나타, 그랜저, 에쿠스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모델 개발에 참여한 국내 자동차 산업의 산 증인 이충구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지능형자동차플랫폼센터장(전 현대자동차 사장)은 1973년 포니 개발을 막 시작하던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만큼 당시 국내 자동차 산업 환경은 열악했다. 전쟁 이후 미군이 남기고 간 차량을 재생해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GM이나 포드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과 기술 제휴를 통해 모델을 들여와 겨우 조립만 하는 수준이었다.
이 센터장은 "자동차학과라고 해서 입학했는데 실습을 할 수 있는 장비라고는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자선단체에서 기증받은 낡은 지게차 한 대가 고작이었다. 어느 날 교수님이 어디선가 고장난 변속기를 하나 구해오셨는데, 같이 전공하던 동기생들이 다 달라붙어 분해한 후 다시 조립하고 보니 남은 부품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그는 학군장교(ROTC)로 군 수송병과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자동차 운전과 정비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이 센터장이 1969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울산으로 내려갔을 때만 해도 공장에서 하루에 포드의 '코티나' 자동차 2∼3대를 조립하는 것이 고작이어서 1년에 1000여대를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다른 국내 자동차 업체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하지만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공업정책' 선언과 함께 자동차공업의 기본 방향과 목표를 '완전 국산자동차 생산 및 수출기반 확립'으로 선언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정부는 자동차육성계획을 발표하며 73%의 국산화 계획을 제출하지 못하는 회사는 부품수입을 금지하기로 했다. 업계는 실정을 모르는 얘기라고 반발했지만, 마침 포드와 합작투자 계약이 결렬된 현대차는 정주영 회장의 결단으로 독자적인 고유모델 개발을 추진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이 센터장이 공장에서 3년간의 현장경험을 한 후 서울 본사로 발령받아 근무하고 있던 어느 날, 선임 팀장이 당시 대리였던 그를 옥상으로 불렀다. 팀장은 현대자동차의 첫 번째 고유모델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느냐고 물었다.
이 센터장은 "해외 출장이나 연수는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는데 이탈리아를 가야 한다고 해서 무조건 한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자동차 개발을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아마 알았다면 절대 못 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몰라 무모했고, 무식해서 용감했다"고 말했다.
사실 현대자동차의 고유모델 개발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 포드사의 기술을 빌려 5년 동안 자동차를 조립생산한 경험이 전부였던 현대자동차는 이전까지 부품 하나 스스로 설계해본 적 없는 초보였던 것이다. 고유모델 개발에 투입해야 할 예산은 우리 돈으로 약 280억원으로 추정됐다. 당시 현대차의 자본금이 17억원이었으니 그야말로 무모한 결정이었다. 특히 고유모델을 개발하기 위해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는 기술자들에게는 엄두가 안 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정주영 회장이 평소 친분 관계가 있던 일본 미쓰비시의 구보 회장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메모 수준의 양해각서를 받아오며 본격적으로 모델 개발이 진전되기 시작했다. '랜서'라는 미쓰비시의 소형차 새시 위에 우리 고유 모델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차체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이끄는 이탈디자인에게 맡겼다. 포니 프로젝트의 본격적인 진행을 위해 기술팀이 이탈리아로 가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 센터장을 비롯한 5명의 연수팀이 생면부지의 나라로 날아갔다.
이 센터장은 "이탈리아에 가니 매일이 문화 충격이었다. 선진국과의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설계실에서 도면을 만드는데, 하루에 겨우 선 하나를 그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선인지, 어떻게 그리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몰라도 일단 옆에서 무조건 그대로 적어놓고 저녁 시간에 모여 그 날 배운 것을 정리했다"고 말했다.
이때 적은 노트가 언론에 소개돼 유명해진 '이대리 노트'다. 이탈리아 디자이너와 기술자들과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에는 이탈리아어를 한국어로 설명해 주는 사전도 없었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 하더라도 개발 과정을 파악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개발을 시작한 지 불과 1년 반 만인 1974년 국제 모터쇼에 포니 콘셉트카가 선보였고, 주지아로의 세련된 디자인은 전 세계에서 모인 관람객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이 센터장은 "2월부터 백지부터 설계를 시작해 10월 말에 차 2대를 토리노 모터쇼에 내놨다. 나조차도 그 차가 실제 굴러가는 차라고는 생각 못 했다. 이탈리아와 한국이라는 뜨거운 두 민족이 만나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어느 나라 사람이 해도 그 기간에는 못 한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당시 신혼 8개월 만에 출국했고,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6개월 된 첫 아이를 공항에서 처음으로 안아 보았다. 치열한 타향살이 끝에 디자인 과정을 마치고 완성된 도면을 가져왔지만,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도면이 있어도 만들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부품에 대해서는 형상만 그려져 있었고, 구체적인 실제 제작용 도면은 전혀 없었다.
이 센터장은 "도면에 영어 대신 이탈리아어가 쓰여 있고, 규격도 국내에서 쓰는 미국 기준이 아니라 이탈리아, 독일 규격에 맞춰져 있어 읽기조차 어려웠다. 당시 유럽이나 미국, 일본 수준에서는 그 도면으로도 제작이 가능했지만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막막했다"고 말했다.결국 다시 전체 차량 개발 과정과 도면의 기준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해외에서 자동차 개발 경험이 있는 전문 경영인과 기술자들을 모아 도면을 다시 검토하고, 양산을 위한 세부 과정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품 수급이 문제였다. 국내에는 제대로 된 부품업체가 전무했다. 당시 고무벨트를 만드는 업체는 방앗간에서 쓰는 벨트나 만들었고, 철물은 드럼통을 손으로 두드려 만드는 수준이었다. 도면을 줘도 부품을 만드는 게 불가능했다.
이 센터장은 "다시 미쓰비시에 가서 부품을 만드는 협력사를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와주기로 하긴 했지만 서러움이 많았다. 미쓰비시에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들의 제품을 사용하려면 자신들에게도 통과료를 내라는 식이었다. 납품 업체에 접촉하는 것도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포니 프로젝트는 다국적 기술의 종합 작품이었다. 플랫폼은 일본, 설계 디자인은 이탈리아에서 받아왔고, 생산 기술은 영국 자문단의 도움을 받았다. 개발이나 양산 단계로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생산 기술은 일본 방식을 도입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손으로 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각 분야별로 직접 부딪혀 배워가며 경험을 쌓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센터장은 "어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심지어 내부에서도 경영진과 말이 안 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들을 설득시키고 제대로 된 차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우여곡절 끝에 1975년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 1호 차가 세상에 선을 보였다. 부품 업체들이 즐비한 지금도 신차를 만들기에 벅찬 기간인 26개월 만이었다. 무모한 도전이 헛되지 않았다. 도로에 나온 포니는 첫해에 국내 시장을 석권한 데 이어, 국내 자동차 산업의 염원이었던 수출에도 성공해 국산 자동차 신화의 출발점이 됐다.
이 센터장은 "포니 출시 이후 우리보다 조금 앞서가는 나라들을 추월하는 것을 늘 목표로 삼았다. 나름대로 매년 기술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는데, 일본과 독일 업체들이 항상 따라잡아야 하는 리스트에 있었다. 1998년 시카고 모터쇼에서 과장들을 모아 놓고 이제는 우리가 미국 '빅3'와도 해볼 만하다고 얘기했던 게 생각난다. 미국에 자동차를 수출하는 나라는 독일과 일본, 그다음 한국밖에 없다"고 말했다.국내 자동차 산업은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선진국의 자동차산업을 빠르게 추격하는 입장에서, 자동차 산업의 새로운 리더로 도약하는 전환기에 들어섰다. 자동차 제조와 제품 측면에서 고유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미래 기술을 선도하는 혁신역량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센터장은 최근 국내 자동차 산업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오히려 세계적인 위상에 비해 낮은 점을 아쉬워했다.
그는 "최근 중국 전기자동차 업체 BYD와 미국 테슬라를 직접 가봤는데 이들 국가의 정부 정책은 완전 '서포트'에 맞춰져 있어 발전이 엄청나게 빨랐다. 중국은 벌써 전기버스와 전기차가 도로에 다니고 충전도 무료로 해주고 있다. 사회적으로 자동차 산업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보다 공격적으로 투자하지 않으면 한국 자동차의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남도영기자 namdo0@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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