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미더운 화학생활용품 … 건강한 상식 활용 중요
![[이덕환의 과학세상] (553) 화학물질 포비아](http://contents.dt.co.kr/images/201605/2016051802100976650001[1].jpg "[이덕환의 과학세상] (553) 화학물질 포비아")
가습기 살균제에 놀란 소비자들이 '화학물질'에 대한 공포에 떨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화학물질이 아니다. 그동안 기업들이 맹목적으로 살균·항균·제균·방균을 자랑해왔던 생활용품들이 공포의 대상이다. 소비자들이 살균을 앞세운 비윤리적인 기업들의 공포 마케팅의 실체를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언론이 신중해야 한다. 자칫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대한 관심을 희석시키게 될 선정적인 보도는 자제해야 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생활환경에서 세균(박테리아)과 곰팡이를 죽여 없애지 않으면 당장 심각한 재앙을 닥쳐올 것처럼 믿었다. 건강하고 쾌적한 생활을 위해서는 실내 공기를 방향제·탈취제로 가득 채워야 하고, 빨래에도 반드시 살균제를 뿌려야만 한다고 믿었다. 깨끗한 물에 비누·세제로 빨아서 잘 말리기만 하면 대부분의 세균과 곰팡이가 제거된다는 건강한 상식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기업의 무차별적인 살균 마케팅이 만들어낸 비정상이다.
일부러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세균과 곰팡이를 완전히 제거해버릴 수는 없다. 세균과 곰팡이도 지구 생태계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무차별적인 살균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미생물의 내성을 키워줘서 슈퍼박테리아처럼 퇴치 불가능한 슈퍼미생물의 등장을 가속화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유익한 유산균·대장균·효모 등의 미생물도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멸균된 환경에서는 우리의 면역력도 퇴화할 수밖에 없다. 면역기능이 완전히 갖춰지지 않은 어린이의 경우에는 문제가 정말 심각해질 수 있다. 면역기능을 충분히 단련시키지 못하면 작은 자극에도 면역체계가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면역 이상증세가 나타나기도 한다. 아토피가 바로 그런 증상이다.
진짜 살균력이 있는 제품은 약사법으로 관리하는 '의약외품'과 농약관리법으로 관리하는 '농약'뿐이다. 산업부가 관리하는 공산품은 살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살균력을 자랑하는 공산품은 경계해야 한다. 밀폐된 실내에서 살균력이 있다는 공산품을 장시간 사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오존 발생 장치가 있는 공기청정기가 대표적이다. 공기 청정기를 장시간 틀어놓은 방에서 비릿하고 시원한 느낌이 느껴지면 반드시 환기를 해야만 한다. 실내에 연속적으로 방향제나 탈취제를 뿌려대는 일도 경계해야 한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오염원을 깨끗하게 제거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해결 방법이다.
'보존제'가 들어있는 생활용품·화장품·식품은 살균력이 있는 공산품과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수분이 들어있는 상태로 생산·유통·소비되는 제품에는 반드시 보존제가 필요하다. 보존제를 넣지 않은 제품은 유통·소비되는 과정에서 심각하게 부패되거나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존제를 넣을 때보다 더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보존제의 위험과 편익을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천연 살균제가 인체에 안전하다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피톤치드'(phytoncide, 식물살생물질)는 식물이 미생물을 퇴치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식물이 인간의 건강을 위해 피톤치드를 만든다는 주장은 과도한 인간우월주의가 만들어낸 착각이다. 피톤치드도 지나치게 흡입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보존제의 종류와 독성에 대한 정보가 소비자를 안심시켜주지도 않는다. 식품 포장재에 깨알같이 소개돼 있는 성분 표시가 소비자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부의 합리적인 규제를 강화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소비자가 건강한 상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모든 살생물제(biocide)의 독성을 밝혀내서 철저하게 관리하겠다는 환경부의 발표가 오히려 소비자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미생물을 죽이는 살생물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소금·설탕·식초도 살생물제다. 환경부가 독성 살생물질이라고 밝힌 '시트릭애시드'는 사실 레몬의 신맛을 만들어내는 '구연산'(레몬산)이다. 인간의 예지력으로는 공업용 살균제의 인체 독성조차 파악할 수 없다는 발언은 화학·독성학의 성과를 무시하는 황당한 발언이다.
이덕환 서강대 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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