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선규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디지털인문학] `융합`, 르네상스 예술가서 배우자](http://contents.dt.co.kr/images/201607/2016071502102251607002[1].jpg "[디지털인문학] `융합`, 르네상스 예술가서 배우자")
문화예술 및 문화산업 분야에서 최근 3년 동안 가장 빈번히 언급되는 화두를 꼽으라면 단연 '융합'(혹은 '융복합')이다. 융합(fusion)은 말 그대로 두 가지 이상의 분야를 함께 아우르고 통합시킨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두 개 이상의 학문 분야가 공동으로 연구하는 일을 가리키기 위해 흔히 '학제간(interdisciplinary)'이란 말이 쓰였는데, 융합은 '학제간'보다 한층 더 '실질적인 통합'과 새로운 분야의 '창출'을 강조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사회를 반영한다." 이 일반 원칙에 따라 볼 때, 융합도 분명 현대 사회의 어떤 특징이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몇 가지만 기억하자면,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여러 매체들의 통합, 서로 다른 분야를 결합시킨 새로운 산업 분야와 직업군의 출현, 소비자들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욕망, 백화점식 분과 학문들의 일면성과 한계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 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융합이 시대적 키워드로 부상한 배경에는 어떤 중요한 교육적 지향점이 놓여있다. 바로 창의적 교육을 향한 요구다. 다시 말해, 대학 교육의 측면에서 융합의 실질적 내용은 다름 아닌 '융합적 창의성'에 있다. 문제는 과연 어떻게 융합적 창의성을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가이다. 이질적인 교과목들을 동시에 배우면 저절로 융합적 창의성이 생기는 것인가. 가령 문과대 학생들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공대 학생들이 문학을 배우면 저절로 융합적인 인재가 될 수 있는가. 사실 융합을 둘러싼 모든 고민과 논란은 이 문제, 곧 융합적 창의성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수렴된다.
여기서 나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융합적 사상가였던 알베르티(L. B. Alberti, 1404-1472)를 잠시 기억하고자 한다. 알베르티의 이름은 들으면 금방 <회화론(De pictura)>(1435/36)을 떠올린다.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는 <회화론>은 그의 이름을 후대에 가장 널리 알린 책이다. 하지만 알베르티를 미술이론가 쯤으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우선 알베르티는 당대의 뛰어난 인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을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가령 <회화론>에서 그는 회화의 세 가지 요소로 '도안', '구성', '빛과 색채'를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키케로와 퀸틸리아누스의 수사학을 충실하게 이해하고 이를 회화에 응용한 결과다. 또한 알베르티가 쓴 <건축론>은 로마의 고전적 건축가 비투르비우스(Vitruvius, B.C. 80-15)의 <건축론 10서>를 세밀하게 재독해하고 이를 당대의 사회적, 문화적 필요에 맞게 재창조한 결실이었다.
알베르티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만약 그가 고대의 전통을 단지 재발굴하기만 했다면, 그는 결코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사상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알베르티의 이론적 관심은 근본적으로 '실천적인' 것이었다. 즉 그는 자신이 이해한 사상적 유산들을 당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조적으로 조합하고 실험했다. 구체적으로 알베르티는 회화, 조각, 건축 등의 조형 예술 분야에 엄밀한 이론적 토대와 높은 정신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실천적 관심을 갖고 있었다. 동양의 장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전까지 이들 분야는 초라한 대접밖에 받지 못했다. 문법, 수사학, 논리학, 산술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 등은 '자유로운 기예(artes liberales)'라 칭하며 정신적 교양을 위한 기초학문으로 인정한 반면, 이들 조형 예술은 다른 많은 수공업들과 함께 여전히 '천박한 기예(artes vulgares)'에 속해 있었다.
알베르티는 바로 이런 오랜 관행을 뒤집고자 했다. 그가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두 가지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시, 문법, 수사학, 기하학, 광학, 음악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이론적 전문성'과 직접 회화, 조각, 건축을 도안하고 형상화할 수 있는 '실천적인 손'을 겸비하고 있었다. 후자와 관련해 알베르티는 예리한 관찰력과 명민한 학습 능력 또한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특히 그가 마사치오, 브루넬레스키와 같은 당대 조형 예술가들의 성취를 얼마나 빨리 자기 것으로 만들고, 또 얼마나 정확히 이론적으로 설명하는가에서 잘 드러난다.
알베르티의 융합적 혁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가장 두드러진 것은 관심의 일관성과 지속성이다. 알베르티는 조형 예술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심화하고 체계화한다는 문제의식을 평생 동안 끈기 있게 견지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아는 것, 배운 것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자극과 배움에 늘 열려 있었다. 알베르티는 진정한 창의성에 관해서도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전해준다. 진정으로 새로운 창조는 결코 피상적인 모방이나 시류를 좇는 데서 오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전승된 고전에 대한 철저하고 깊은 이해를 토대로 해야 한다. 또한 그것은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 능력, 그리고 자유롭고 실천적인 실험 정신의 결과다. 이로부터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인문학의 깊이와 전문성을 가볍게 여기는 모든 융합은 공허하고 순간적인 유행에 그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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