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선규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디지털인문학] 백남준의 `열정과 아이러니`](http://contents.dt.co.kr/images/201609/2016092302102251607001[1].jpg "[디지털인문학] 백남준의 `열정과 아이러니`")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세상을 뜬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10주기가 되어서인지 올해는 백남준 관련 전시와 행사가 유난히 많다. 용인의 <백남준 아트센터>에서는 <뉴 게임플레이 전>이 열리고 있으며(내년 2월 19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추모전 <백남준 ∞ 플럭서스>가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이달 말까지) 그리고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는 좀 더 대중적인 성격의 전시 <백남준 쇼>가 10월 말까지 진행 중이다. 또한 그가 태어난 종로구 창신동 생가에는 올해 말 개관을 목표로 <백남준 기념관>이 한창 공사 중이다. 이 기념관에는 백남준의 삶과 예술에 관한 일반적인 소개와 함께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1930-40년대 동대문 일대의 일상과 문화에 초점을 맞춘 상설전이 개최될 예정이라고 한다. 백남준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세계적으로 지명도가 가장 높은 한국 출신 예술가다. 따라서 고국인 우리나라에서 이렇듯 다양한 전시와 행사가 열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세 가지 전시 가운데 <백남준 쇼>를 둘러보았는데, 이 전시를 보면서 새삼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백남준이 왜 이렇게 유명한 걸까? 그는 대체 어떤 예술가였지? 그의 가장 소중한 예술적 혹은 사상적 유산은 과연 무엇일까?' 백남준은 흔히 '전위적이며 명철한 행위예술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기술과 예술을 결합시킨 혁신자',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란 말로 인터넷 시대를 예견한 '정보 무당' 등으로 칭송된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명칭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삶과 예술의 바탕에 놓여 있는 근본적인 '이념'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이다. 그가 삶과 예술을 통해 추구했던 이념, 아니 그의 삶과 예술을 감싸고 이끌었던 이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이 이념을 '인간적 연대(solidarity)를 향한 열정과 아이러니'라고 부르고 싶다.
백남준이 예술을 향한 지독한 열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동경에서 시작된 그의 예술 수업은 독일 뮌헨과 프라이부르크의 음악 대학을 거쳐서 쾰른에 있는 공영방송사(WDR) 소속 음악가로서 일단 그 정점에 도달한다.(그가 본래 상당한 실력을 갖춘 현대음악가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하지만 그는 음악가로서의 지위를 곧바로 박차고 나온다. 그는 행위예술가 그룹인 <플럭서스>에 뛰어들어, 실험 예술가이자 미디어 예술가라는 전혀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만약 그가 계속 방송사 음악가로 남았다면, 그는 결코 우리가 아는 그 백남준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10년 가까이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던 말년까지도 그의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그런데 예술가로서 그가 지녔던 열정은 단지 순수하게 예술만을 위한 열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열정은 다양한 층위의 연대를 향한 열정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은 인간들 사이, 인간과 예술 사이, 예술과 기술 사이, 다양한 예술 장르들 사이에서 가능한 연대를 꿈꾸고 실험하고 유희하고자 했던 다층적인 연대를 향한 열정이었다. 이 점은 이미 초기의 행위예술 작업들에도 분명하게 나타나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다양한 'TV 조각' 시리즈에서도 금방 읽어낼 수 있다. 가령 <백남준 쇼> 첫 번째 방에서 우리는 TV 모니터들을 조합해 만든 여러 종류의 로봇 형상들을 만난다. 그런데 이 형상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기괴하거나 공격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반대로 생김새와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로봇 형상들 모두가 함께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 듯 느껴진다. 백남준이 이들 하나하나를 구상하면서, 인간과 기술, 인간과 예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과 연대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TV 부처'처럼 매우 간명하고 폐쇄적인 구조를 가진 작품에서도 연대의 함의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즉 전자매체 시대를 긍정하면서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문명, 초월성과 내재성, 내면과 외면,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의 만남과 교류를 시도하겠다는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연대를 향한 열정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백남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백남준은 열정 못지않게 '아이러니적 태도'를 온몸에 체득했던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프랑스혁명의 세 번째 이념인 연대의 열정에 충실하였지만, 결코 열정에 매몰되거나 열정을 절대시하지는 않았다. 열정의 끝에 빈번히 허무가 있음을 예감했기 때문일까. 그는 열정 옆에 항상 아이러니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열정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되, 열정 이후를 늘 염두에 둔 것이다. 백남준의 모든 작품을 관류하고 있는 '풍자와 유희'의 제스처는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인생에는 되감기 버튼이 없다." 백남준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이 말을 하면서도 마음속에서 동시에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술에는 되감기 버튼이 있어, 물론 되감기를 영원히 할 수는 없고, 가끔 고장도 나고 지루할 때도 있지만." 이렇게 연대의 열정과 함께 아이러니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담담하게, 환상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 것. 이것이 아마도 백남준의 남다른 매력과 친화력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이번 <백남준 쇼> 전시는 백남준의 작업과 젊은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때론 병치시키고, 때론 서로 결합시키고 있다. 백남준의 열정과 아이러니라는 양면적 입장과 잘 부합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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