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디지털인문학] 웅녀와 칼리스토 사이에서](http://contents.dt.co.kr/images/201610/2016100702102251607001[1].jpg "[디지털인문학] 웅녀와 칼리스토 사이에서")
하늘이 열린 날. 이날을 개천절(開天節)이라 한다. 우리는 단군이 우리민족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을 세운 날로 기념하지만, 그보다 124년 앞서 환인이 하늘을 활짝 열고 환웅을 이 세상에 보낸 날이다. 환웅은 험한 자연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하겠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으로 내려왔다. 인간에 대한 사랑, 약자에 대한 배려, 그것이 우리민족의 얼이다. 거기에 이치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이화세계'(理化世界)의 통치원리가 덧붙는다. (그러니 상식과 원칙을 무시하고 민중을 '개돼지' 취급하는 지도자들, 공무원들, 정치가들은 우리민족의 전통을 짓밟는, 그야말로 '얼'빠진 놈들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따르면, 암곰 한 마리가 인간이 되고 싶어 환웅을 찾아왔고 쑥과 마늘만 먹고 견뎌 여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짝이 없었고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다. 그녀는 매일 기도를 올렸다. 이를 딱히 여긴 환웅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그녀와 혼인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그가 단군이다. 그는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불렀고 1500년 동안 다스렸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신화와 정반대의 이야기가 그리스로마신화에 있다. 그 주인공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의 칼리스토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온다. 칼리스토는 순결한 처녀로서 디아나(=아르테미스) 여신과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에 반한 윱피테르(=제우스)가 안달이 났다. 그는 디아나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다가갔다. 방심한 칼리스토는 저항 한 번 못하고 윱피테르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디아나는 분노하고 칼리스토를 쫓아냈다. 윱피테르의 부인 유노(=헤라) 여신은 격분하여 그녀를 암곰으로 만들었다. 아무 죄도 없는 칼리스토는 유피테르의 폭력에 순결을 짓밟히고 쫓겨나 암곰으로 변해 고통스럽게 떠돌며 살아야 했다. 인간의 꿈을 품은 곰의 소원에 귀를 기울여 인간이 되고 하고, 그녀를 따뜻하게 품어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게 한 환웅의 품격에 비하면, 그리스로마의 최고신 유피테르, 곧 제우스는 제멋대로 설치는 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칼리스토의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가 곰이 되기 전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아르카스였다. 아르카스는 씩씩한 사냥꾼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숲속에서 암곰을 만났다. 그 암곰은 칼리스토였지만, 곰으로 변한 어머니를 아르카스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암곰의 모습으로 아들을 만난 칼리스토는 반가움의 기쁨과 슬픔에 어쩔 줄 몰랐다. 아르카스는 꼼짝하지 않고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암곰에게 창을 겨누었다. 윱피테르는 깜짝 놀라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모자를 들어 올렸고, 밤하늘의 별이 되게 했다. 칼리스토는 북두칠성이 찬란한 큰곰자리가 됐고, 아르카스는 그 옆을 지키는 작은곰자리가 됐다.
어떤 이야기로 살아가느냐는 한 사람, 한 민족의 세계관과 품격을 결정한다. 우리에겐 참으로 고귀한 이념의 건국신화가 있다. 인간을 사랑하며 배려하는 신들이 더불어 사는 합리적인 세상이 우리의 이야기를 채운다. 그러나 이 고품격의 신화가 이 나라, 이 민족의 지도급 인사들을 무조건 환웅과 단군으로 그려주진 않는다. 그들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의 원천인 국민들을 업신여긴다면 그들은 우리 이야기 속의 주인공일 수 없다.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 욕망을 맘껏 채우며 국민을 고통에 빠뜨린다면, 그들은 우리 이야기 안에서, 그것이 그려주는 세상 안에서 살 자격이 없다. 그들은 우리 이야기 바깥에 있는 낯설고 위험한 존재들이다. 다른 나라, 다른 민족 이야기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윱피테르와 같은 존재들이다.
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나쁘고 우리 신화가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권력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비판하고 조롱하는 유쾌한 힘이 있다. 그들은 그 이야기로 아픈 현실을 통찰하고 견뎌내며 그들만의 아름다운 세상을 상상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고유한 가치가 있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나 그들이 품고 사는 이야기가 있다. 그에 걸맞은 삶을 살 때, 그 고유한 정체성과 자존감을 가지고 살 수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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