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인과관계' 부작용 증명 불가능
가해기업에 '면죄부' 주는 핑계일 뿐
가해기업에 '면죄부' 주는 핑계일 뿐
![[이덕환의 과학세상] (600) 가습기 살균제](http://contents.dt.co.kr/images/201705/2017051002101276650001[1].jpg "[이덕환의 과학세상] (600) 가습기 살균제")
환경부가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해결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폐 섬유화 이외의 여러 가지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들의 참혹한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과학적 인과관계를 확인하지 못하면 가해기업으로부터 구상권을 청구하기 어렵다는 것이 환경부의 알량한 핑계다. 역시 구상권 행사가 난망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 달라도 너무 다른 횡포다. 과연 환경부가 국민을 위한 일을 하는 부처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환경부가 요구하는 '과학적 인과관계'는 현실적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것이다. 치명적인 독성이 확인된 가습기 살균제의 부작용을 사람을 대상으로 확인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절대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쥐나 제브라피시 등을 이용한 제한적인 동물실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동물실험의 결과는 사람이 경험한 부작용을 입증해주는 과학적 증거가 될 수 없다. 독성물질에 의한 부작용은 생물에 따라 전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굳이 독성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피해가 발생하고 6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피해자가 사용했던 제품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일부 제품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사용기한이 넘어서 더 이상 과학적 증거가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적 증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환경부의 입장은 과학을 핑계로 기업을 감싸고, 피해자를 우롱하는 것이다. 더욱이 판단이 지연된 것은 온전하게 환경부의 무지·무능·무책임 때문이지 피해자의 탓이 아니다.
환경부의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독성·역학 전문가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현대의 독성학과 역학이 모든 질병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동물실험의 한계를 분명하게 밝히고, 무책임한 환경부를 대신해서 피해자를 도와줘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현대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주장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1980년대 미국에서 불거졌던 석면 노출 피해자들에 대한 미국 법원의 해결 노력을 참고해야 한다. 미국의 법정에서 요구한 증거는 무의미한 동물실험의 결과가 아니었다. 석면 노출을 입증해줄 최소한의 자료와 피해자들이 병원에서 임상적으로 확보한 영상진단 자료가 법원이 요구한 증거의 전부였다. 동물실험 자료가 없더라도 과학적 판단은 가능했고, 기업에 엄중한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석면 제품의 유해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핑계가 되지 못했다.
환경부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 어설픈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얄팍한 생각은 하루빨리 버려야 한다. 구상권을 핑계로 정부의 예산을 아껴보겠다는 생각도 궁극적으로는 국민을 위한 것일 수 없다.
정부가 살인적인 제품의 생산·유통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책임은 절대 회피할 수 없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습기 살균제의 사용 여부를 확인해주고, 확실하게 드러난 임상 자료를 근거로 적극적인 지원과 보상을 해줘야 한다. 과학을 핑계로 피해자를 괴롭히는 일은 절대 용납받지 못할 것이다.
새 정부에서는 자신들의 책임을 애써 외면해왔던 환경부와 참사의 근본적인 단초를 제공했던 산업부에 대한 무거운 정치적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최소한의 과학적 상식도 갖추지 못한 환경부에 대한 해체 수준의 개혁도 필요하다.
옥시에 금전적 보상을 받고 어설픈 용역 보고서를 만들어준 독성학자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도 아쉬운 것이었다. 기업의 용역과제를 수행하는 연구자가 기업의 요구를 수용한 것은 부정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전 세계 모든 연구자에게 적용되고 있는 '이해상충 금지'의 윤리기준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덕환 서강대 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탄소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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