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진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소장
![[디지털산책] `과기인 협동조합` 새 모델 주목해야](http://contents.dt.co.kr/images/201802/2018022802102251607002[1].jpg "[디지털산책] `과기인 협동조합` 새 모델 주목해야")
우선 안정적인 생필품 조달을 목적으로 돈을 모아 작은 가게를 마련했다. 직접 도매로 구매한 물품은 돈을 낸 사람에게만 약간의 이윤을 붙여 판매했다. 판매 소득은 일 년 뒤 가게 운영비를 제하고 구매실적에 따라 나눠 가졌다. 가게 운영은 함께 모여 동등한 투표권을 가지고 결정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근대적인 협동조합으로 평가받는 '로치데일 협동조합'이다. 노동자들은 함께 모여 공동의 갈증을 논한 뒤 다 같이 나누는 새로운 공유 모델을 만들어냄으로써, 산업혁명이라는 급격한 사회 변화를 지혜롭게 이겨냈다.
우리나라는 2012년 12월에 '협동조합기본법'이 발효됐고, 이듬해 5월부터 과학기술인들의 협동조합 참여와 안정화를 지원하는 '과학기술인 협동조합 육성·지원 사업'이 추진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전담 지원센터를 통해 사업화, 교육·컨설팅, 일거리 연계 등을 지원하고 있다. 2013년 사업 시작 당시 42개이던 과학기술인 협동조합은 2017년 말 264개로 연평균 58.3% 늘었다. 또, 사업화 지원을 받은 협동조합의 절반 이상이 1년 이내에 실제 매출을 내고 있다.
우리나라 인구 고령화는 세계적으로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작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14%로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했고, 2026년부터는 20% 이상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전망이다. 올해는 베이비붐 세대(58년생)의 본격 퇴직이 시작되는 해로, 이들의 인생 2막 설계를 위한 사회적 지원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특히, 고경력 과학기술인들의 전문성을 국민 삶을 개선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면, 사회적 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는 퇴직한 고경력 과학기술인과 청년을 연계하는 협동조합 사업 모델이 청년과 퇴직자의 일자리 문제와 사회적 경제 활성화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지멘스그룹 세드리크 나이케 부회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상사-부하라는 전통적인 지휘체계가 깨지는 다층적인 협업시스템이 구축될 것"이라고 했다. 협동조합의 민주적이고 유연한 운영방식이 고경력자의 전문성과 경험, 청년들의 아이디어와 열정을 시·공간의 제약 없이 이어줄 수 있다. 협동조합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일하는 디지털노마드에게도 새로운 협업 방식이다.
협동조합의 민주적이고 투명한 가치 공유 방식은 현재 추구되는 '사회적 경제'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2018년 다보스포럼에서는 공동체 운명을 기반으로 서로 협력하고 상생하는 새로운 모델을 논의했다. 우리 정부도 '사회적 경제 활성화'를 국정과제로 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연대·협력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제4차 일자리위원회에서는 '과학기술·ICT 기반 일자리 창출방안'을 발표해 과학기술과 사회적 경제의 연계 강화, 과학기술인 협동조합 활성화를 통한 지속가능한 일자리 창출에 힘쓰고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은 그 변화 속도가 빠르고 방향을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우수한 정보통신 기술력과 양질의 인적자본을 보유하고 있다. 사회가 변화해도 이를 선도해 나갈 동력은 결국 '사람'이다. 지역과 나이를 뛰어 넘어 개개인의 전문성을 서로 연결해 다 같이 잘 살 방법을 고민하고 함께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 과학기술인 협동조합이 새로운 가치 모델이 될 수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위기는 바로 오래된 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못한 시기'라고 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산업혁명의 파고를 헤쳐 나갔던 200여 년 전 로치데일의 노동자들처럼,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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