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DT현장] 원자력기술 자립史를 아는가!](http://contents.dt.co.kr/images/201902/2019021902102269731001[1].jpg "[DT현장] 원자력기술 자립史를 아는가!")
지난달 25일 대전 KAIST 기계공학동 공동강의실. 금요일 점심 시간임에도 200개가 넘는 좌석에서 빈자리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강의실은 KAIST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 원자력 종사자 등으로 가득 찼다. 이들이 점심식사를 뒤로 하고 이곳을 찾은 이유는 원자력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장윤일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석학연구원의 특강을 듣기 위해서였다.
장 석학연구원은 미국에서 차세대 원자로를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원자력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로런스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한 세계 원자력 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과학기술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 입장에서 정부의 급격한 탈원전 기조 속에 국가·사회적으로 원자력 찬반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세계적 석학은 어떻게 진단하고,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지, 나아가 앞으로 국가 에너지 정책에 어떠한 통찰력과 혜안을 제시해 줄지 궁금해서 끼니를 거른 채 강의실을 찾았다.
'세계 원자력의 현황과 전망'을 주제로 2시간 가까이 강연을 하던 도중, 장 석학연구원은 PPT 화면 속에 있는 흑백의 단체 사진 한 장을 소개했다. "한국 원자력 기술 자립의 주역들이죠. 사진 속 주인공 중 3명이 여기에 와 있다"며 자리에 앉아있던 백발의 노신사들과 눈맞춤을 했고 이들은 가벼운 미소로 응대했다.
세 명의 노신사가 포함된 사진은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난히 초겨울 바람이 세차게 불던 1986년 12월 14일 대전 유성구 한국원자력연구소 본관동에 44명의 원전설계팀 연구자들이 하나 둘씩 모였다. 미국 CE사로부터 원자로 계통 설계 관련 기술전수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한국 원자력 기술자립을 이끈 故 한필순 전 소장이 가지고 나온 '必 설계기술 자립'이라고 쓰여 있는 액자를 가운데 놓고 연구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원자력 기술자립'을 위해 적지로 떠나는 44명 연구자들의 결연한 모습이 마치 '특공대'와 같아 보였다. 한 소장과 44명의 연구자들은 "원자로 설계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태평양 바다에 빠져 죽겠다"고 결의를 다졌고, 다같이 '원자력 기술 독립' 만세삼창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들은 미국 도착 이후 원전 두뇌에 해당하는 '원자로 계통' 설계기술을 배우기 위해 온갖 서러움과 무시, 냉대 등을 견뎌야 했다. 이들 가슴 속에는 오로지 '원자력 기술 자립'이란 막중한 책임감과 우리 손으로 원전을 짓겠다는 사명감 밖에 없었다. 그렇게 밤낮을 잊고 3년 간 혼신의 힘을 다해 공부하고 설계에 매달린 끝에 1988년 원자로 계통 설계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확보한 설계 기술을 토대로 '한국형 표준원전'인 울진 3·4호기를 1998년, 1999년 각각 완공해 그토록 원하던 '원자력 기술자립의 꿈'을 실현했고, 20년 후인 2009년에는 우리의 원전 모델을 UAE에 수출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원자력 기술자립'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피나는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정부는 원자력을 '찬밥 신세'로 내몰기 시작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 속에 원자력을 '적폐'로 보고,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국내 원자력 생태계를 무너뜨렸다. 30년 전 이역만리 타국에서 숱한 서러움과 어려움을 견뎌내며 '두뇌로 생산하는 에너지'로 불리는 원자력 기술 자립을 위해 젊음을 바친 과학자들의 소중하고 고귀한 노력은 인정받지 못하고 깡그리 무시당했다. 올해는 원자력 기술자립의 주역인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설립된 지 60주년을 맞는다. 사람 나이로 예순을 맞이한 것이다. 그렇지만 원자력을 바라보는 이 정부의 불순한 시선 때문에 60년을 맞이했다는 기쁨보다는 절망감이 크다. 연구자의 사기도 꺾인 지 오래다. 명확한 이유 없이 기관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떠난 지 벌써 3개월이 돼 가는 등 연구원 안팎이 뒤숭숭할 뿐이다.
원자력 산업도 붕괴 직전이다. 이렇다 보니 원자력 전공 기피 현상이 생겨 미달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어렵게 쌓은 원자력 공든탑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안타까운 형국이다. 최근 여당 내에서도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놓고 설전이 오가는 등 원자력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원자력은 분명 양면성이 있다. 그래서 정책 결정 시 균형감이 중요하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원자력 논쟁의 본질에 대해 보다 객관적·중립적으로 접근하고, 친원전·탈원전 양 진영에 대한 균형적 시각을 통해 장기적 관점에서 합리적 에너지 정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44명의 연구자들과 또다른 원자력 분야 연구자들이 어떻게 원자력 기술자립을 위해 노력했는지를 되새겨 봤으면 한다.
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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