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DT현장] 얄팍한 정책이 부른 `소·부·장` 재앙](http://contents.dt.co.kr/images/201909/2019091702102269731001[1].jpg "[DT현장] 얄팍한 정책이 부른 `소·부·장` 재앙")
지난 7월 일본 수출규제 이후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와 기술자립 강화가 국가적 최대 이슈로 불거지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지원에 냉담했던 정부가 정책 방향을 바꿔 지원 강화로 입장을 급선회했다. 이번에도 '사후약방문'식 대응에 익숙한 우리 정부의 정책 순발력이 여지없이 발휘됐구나라는 생각에 씁쓸함이 한층 커졌다. 일본 수출규제 조치 덕분(?)에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무관심 정책 고객'에서 한 순간 'VVIP 정책 고객'으로 대접받는 등 신분이 상승했다는 우스갯 말이 나올 정도라니, 산업계가 평가하는 우리 정부의 정책 신뢰도 수준을 대략 짐작케 한다. 연구 현장의 연구자들도 마찬가지 반응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연구비를 따내려면 온갖 보고서와 서류를 만들어 정책 당국자를 만나 반복된 설득 작업을 통해 그나마 운이 좋아야 최대 3억원 가량의 연구비를 지원받을 정도로 척박한 상황이었다.
소재·부품·장비는 특성상 오랫동안 한 우물을 파야하는 기초·원천 분야라는 사실을 정부 당국자가 모를 리 없다. 장기간 투자가 필요하고, 그마저 성과 창출도 장담할 수 없는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분야다. 그렇다 보니, 투자 대비 성과를 중시하는 정부 당국자 입장에선 자칫 '성과 없이 퍼 준다'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어 지속 지원을 꺼려한다.
더욱이 연구자 입장에서 제 아무리 혁신적 기술을 개발해도 이를 이전받아 양산할 역량을 가진 중소기업이 많지 않다. 또한 설령 양산 수준으로 상용화에 성공해도 수요 기업인 대기업이 써주지 않으면 판로 확보에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섣불리 투자에 나서기 쉽지 않는 산업생태계 구조를 띠고 있다.
이런 현실을 치밀하게 간파한 일본은 우리의 '급소'를 공략해 지난 두 달 동안 대한민국 경제에 커다란 충격파를 안겨줬다. 결국, 정부의 잘못된 판단에 따른 정책적 실수와 소재·부품·장비에 대한 국가의 장기적 R&D 철학 부재가 화근이 돼 자초한 일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정부는 일이 터지자 서둘러 "이번 일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에 정부의 지원과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강력한 정책 의지를 표명했다. 이후 지난달 5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마련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을 시작으로 다양한 정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이 발표되기 이전만 해도 앞서 지적한 대로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분야는 사실상 '찬밥 신세'였다. 반도체 산업의 눈부신 성장 뒤에는 '정부의 지원 축소'라는 그늘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련 통계가 이를 말해준다. 산업부 소관 반도체 분야 R&D 예산의 경우 2010년 1110억원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2011년 960억원으로 쪼그라들기 시작해 2014년 830억원, 2017년 310억원까지 곤두박질쳤다. 7년 새 국가 지원 예산이 3분의 2 가량 토막난 것이다. 정부 지원이 줄여들자 인력 수급은 악화됐다. 서울대 반도체 관련 석·박사 인력은 2006년 97명에서 2016년 23명으로 10년 새 77% 감소했다. 당연히 산업체에서 우수 인력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그렇다보니 반도체 생산은 세계 1위이지만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은 2013년 21%에서 2017년 18%로 떨어졌다. 반도체 소재 국산화율 역시 2011년부터 48%에서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정체기를 맞고 있다.
이를 놓고 반도체 분야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반도체 분야에 대한 정부의 R&D 예산이 2010년 이후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생긴 결과"라고 주장한다. 현장에선 기대보다 우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온다. 지금과 같은 정부의 지원 의지가 과연 지속될 지 걱정하는 분위기다. 이런 우려가 불식될 수 있도록 정부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추락한 정책 신뢰도를 높여야 할 것이다. 열매가 맺기 전에 나무를 흔들어 과실을 수확하려는 조급함에서 벗어나 튼튼한 과실을 얻을 수 있게 인내심을 갖고 키워가는 노력이 더 필요한 때다.
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bong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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