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DT현장] 韓·日 0 대 24](http://contents.dt.co.kr/images/201910/2019102202102269731001[1].jpg "[DT현장] 韓·日 0 대 24")
R&D 과제 기획을 두고 담당 공무원과 연구자 간 대화 내용이다. 몇 해 전 연구현장에서 만난 이 연구자는 '자신의 경험담'이라며 이런 얘기를 들려주며 우리나라 관료들의 '지나친 보신주의 행정'에 혀를 찼다. 문득 이 기억이 떠오른 건 올해 노벨상 수상자 발표가 끝날 무렵이였다.
매년 10월 초 우리나라는 '노벨상 앓이'에 시달린다. 당사자인 과학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죄인인 양 주눅 들어 기를 펴지 못한다. "그동안 뭘 했길래, 노벨상도 못 받느냐"는 따가운 눈초리에 자존감은 한없이 떨어진다. '환절기 감기'처럼 매년 이맘 때면 '노벨상 감기'라는 혹독한 바이러스에 감염돼 곤혹을 치르곤 한다.
올해도 변함없이 노벨상 수상 소식은 우리나라를 비켜갔다. 이에 반해 일본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요시노 아키라 교수가 '리튬이온 배터리' 상용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로써 일본 국적자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모두 24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일본은 세계에서 5번째로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국가로, '기초강국 재팬' 저력이 식지 않았음을 전 세계에 알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노벨상 성적표를 보면 '0대 24'로 큰 격차로 벌어졌다. '이웃 나라'이자 '우리의 영원한 숙적'인 일본과 비교할 때 결코 게임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 점은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점은 바로 이 대목이다. 요시노 교수를 포함해 산업체 출신 노벨상 수상자를 4명이나 배출했다는 점이다. 이게 오늘날 '기술 일본'을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결국, 당장 몇 푼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연구가 아닌, 오랜 기간 '한 우물'을 파야 비로소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기초과학에 대한 올바른 철학과 믿음, 그 가치를 알고 지속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본이 이렇게 기초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 놀라운 일도 전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과학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노벨상이 처음 수여된 1901년, 일본인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가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후보에 포함될 정도로 당시 일본의 기초과학 수준은 서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우리 보다 100여 년 앞서 과학에 중요성에 눈을 뜨고 투자하기 시작한 일본과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앞서 말한 것처럼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이 해 오던 연구를 따라 하던 시대는 지났다. 보다 혁신적이고 독창성 있는,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도전적·모험적 연구를 해야 할 시기다. 그리고 이런 연구를 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장기적 비전과 확고한 철학, 연구자에 대한 신뢰와 믿음 등도 뒷받침돼야 한다. 이에 걸맞게 정부 당국자도 변화하고 혁신해야 한다. 물론 노벨상 수상 자체를 목표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과학자들을 다그쳐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다.
긴 호흡을 갖고 장기간에 걸쳐 과학자들이 과학적 호기심과 창의성, 수월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 주기만 하면 된다. 이런 연구혁신 생태계에서 축적과 시행착오 과정을 거쳐 켜켜이 쌓아올린 연구 자산이 세상과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가치'로 빛을 발할 것이다.
'리튬이온 배터리 아버지'로 불리는 만 97세의 존 구디너프 교수가 올해 노벨화학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역대 최고령 기록을 깼듯이,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 10명 중 7명(72.8%)이 60대 이상이고, 이중 4명이 70대였다. 이들이 한 분야의 연구를 시작해 노벨상을 수상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평균 31.4년이었다.
'마부작침(磨斧作針)'이란 한자성어가 있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말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노벨상 수상자는 물론이고, 이들이 묵묵히 한 우물을 팔 수 있게 도와 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 마부작침일 게다. 이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빨리 성과를 내야 하는 '조급함' 보다는 오래 걸려도 축적을 통해 혁신의 가치가 만들어 지도록 기다려 주는 '기다림의 힘'이 진정 요구된다.
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bong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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