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DT현장] `제2반도체 배터리` 죽이고 있다](http://contents.dt.co.kr/images/202001/2020011602102269781001[1].jpg "[DT현장] `제2반도체 배터리` 죽이고 있다")
사실 이번 CES 2020에서 선보인 대부분의 모빌리티 솔루션은 전기동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CES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꼽히는 로봇 등도 배터리를 기본 탑재하고 있다. 무선청소기 등 이동형 가전기기는 물론이고 향후 무선TV까지 나올 경우 세상에 배터리가 들어가지 않은 제품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5년 전 당시 삼성SDI가 제시했던 사물배터리(BoT·Battery of Things)의 시대가 정말 현실로 된 것이다.
그럼에도 주요 업체들은 배터리를 전시장에 내세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없어서 못 팔 만큼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어서 굳이 소개할 필요 조차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제 공기처럼 필수 부품·소재로 부상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2015년 삼성SDI의 사업장을 방문했던 '에너지혁명 2030'의 저자 토니 세바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교수(경영학)는 "미래 에너지 산업에서는 교통수단과 저장장치의 경계가 허물어질텐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곧 배터리"라고 말했다. 세바는 에너지 세상을 뒤엎을 강력한 대체 에너지가 다가온다고 단언하고, 자동차는 19세기 말 발명된 이후 100년 동안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지만 전기차의 등장으로 100년 시장에 큰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썼다. 당시에는 다소 꿈 같은 얘기였지만, 불과 5년이 지난 지금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다행히 우리나라는 배터리 시장에서 세계 톱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스마트폰 등에 들어가는 소형 배터리 시장에서는 업계 1~2위를 다투는 중이고,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에서도 톱 10에 3개 업체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수요가 급속 확산하면서 시장 전망도 밝다. 현대자동차그룹 글로벌경영연구소의 '2020년 글로벌 자동차 시장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전동차(전기차·수소전기차 등)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9.3% 증가한 555만대로 예상됐다. 2019년 전년보다 15.3% 성장한 429만대를 기록한 데 이어 다시 가파른 성장세를 예고했다. 전기차와 함께 또 다른 배터리 주력 시장으로 꼽히는 ESS(전력저장장치) 역시 마찬가지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세계 ESS용 배터리 시장은 16GWh로 전년(11.6GWh)와 비교해 38%나 성장할 전망이다. 2030년에는 지금의 15배에 이르는 179.7GWh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정부도 이 시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 초 포항규제자유특구 GS건설 투자협약식에 참석해 "핸드폰·전기차·에너지저장장치 등으로 배터리 수요가 빠르게 증가해 2025년이면 (배터리 산업이) 메모리반도체보다 큰 시장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다지 녹록지 않다. 2017년부터 이어진 ESS 화재 사고에 따른 민관합동 ESS 화재사고 원인조사위원회는 부실한 1차 조사로 인해 현재 2차 조사위까지 꾸려져 1년 넘게 ESS 시장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2차 조사위가 15일 최종 회의를 열고 최종 결론을 낼 것으로 알려져 업계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를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다. 그 동안 국내 ESS 시장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해외 수주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등 국내 배터리 산업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 사이에 중국은 강력한 인적·물적 자원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앞세워 단숨에 세계 톱 수준으로 도약했다.
사실 업계에서는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인정받은 한국산 배터리가 유독 국내에서만 푸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공개적인 입장을 내놓진 못하고 있지만 불만이 팽배하다. 중소 시공업체의 난립 등이 근본적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이 경우 중소기업 간 경쟁제품으로 지정한 정부에 책임이 돌아갈 수 있어 결국 대기업에 책임을 떠넘기려 하지 않겠느냐는 우려에서다. 실제로 2018년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 등 업계에서 ESS의 중기간 경쟁제품 지정을 반대했지만, 정부는 끝까지 강행했다.
미래 신산업은 대규모의 투자와 연구개발이 필요한 특성상 자금 여력이 있는 대기업이 시장을 이끌고, 중소기업이 부품 등을 맡으면서 상생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다른 듯하다. 정부는 과거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산업 초기에 이를 중기적합업종으로 지정해 결국 중국 등 외국업체에 시장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는 상황을 자초했다. 지금 우리 제조업은 반도체를 뺀 나머지는 점차 글로벌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배터리와 같은 성장 동력이 분명히 존재한다. 자라나는 소중한 새싹을 우리 스스로 밟아 죽이는 일은 앞으로는 다시는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정일 산업부 재계팀장 comja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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