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족들이 12조원 플러스 알파에 이르는 세계에서 유래 없는 상속세를 원칙대로 6년 간 연부연납하기로 했다고 28일 밝혔다. 일부에서는 고인의 지분 일부를 공익재단에 넘기거나 삼성물산 등 계열사가 상속할 것이라는 추정도 나왔지만, 유족들은 정공법을 택한 것이다.
유족들은 이에 대해 "세금 납부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라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고인의 '사업보국(事業報國)'에 대한 뜻를 조금이라도 훼손해선 안된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고인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지난 2019년 11월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의 추도식 당시 사장단과 오찬을 함께 하며 "사업보국에 대한 이념을 기려 우리 사회와 나라에 보탬이 되도록 하자"고 말한 바 있다.
유족들은 이와 함께 고인이 생전에 약속했던 사회 환원에 대한 약속도 지켰다. 이건희 회장은 2018년 삼성특검 당시 실명 전환한 차명 재산 가운데 벌금·세금을 납부하고 남은 것을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약속했지만, 여러 방안이 검토되던 중 이 회장이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관련 논의가 중단됐다.
이후 재계 일부에서는 유족들이 이 회장 명의의 재단 설립 등의 방식을 내놓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왔지만, 유족들은 평소 의료복지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고인의 뜻을 받들어 1조원의 의료공헌 기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미술품 역시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한 매각 등 다양한 설이 나왔지만, 유족들은 고인이 수집해 온 문화유산에 대한 공익적 사회환원을 택했다. 이 역시 고인의 사업보국에 대한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재계에 따르면 과거 이병철 선대회장은 다수의 문화유산을 일본 등 외국 수집가들에게 헐값에 넘어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나타내며, 각지에서 고미술품 등을 적극적으로 구매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에 이건희 회장의 탁월한 안목이 더해지면서, 2만여점에 이르는 국내·외 희귀 미술작품을 보관하기에 이르렀다.
유족들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보물 1393호), 고려 불화 '천수관음 보살도'(보물 2015호) 등 지정문화재 60건(국보 14건, 보물 46건)을 비롯해 국내에 유일한 문화재 또는 최고(最古) 유물과 고서, 고지도 등 개인 소장 고미술품 2만 1600여점은 국립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아울러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이중섭의 '황소', 장욱진의 '소녀·나룻배' 등 한국 근대 미술 대표작가들의 작품과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작가들의 미술품, 드로잉 등 근대 미술품 1600여점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할 예정이다.
한국 근대 미술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들의 작품 중 일부는 광주시립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대구미술관 등 작가 연고지의 지자체 미술관과 이중섭미술관, 박수근미술관 등 작가 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또 국립현대미술관에는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호안 미로의 '구성',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을 비롯해 샤갈, 피카소, 르누아르, 고갱, 피사로 등의 작품을 기증한다.
문화예술계에서는 이번 유족들의 기부로 문화예술 전시의 수준이 크게 올라갈 것이라며 벌써부터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삼성 측은 "지정문화재 등이 이렇게 대규모로 국가에 기증되는 것은 전례가 없다"며 "국내 문화자산 보존은 물론 국민의 문화 향유권 제고와 미술사 연구 등에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박정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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