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은 산모는 돌봄 문제, 영어유치원비, 학원비 걱정보다 육친(肉親) 교감에 대한 기대감이 훨씬 크다고 한다. 산모들 곁에서 출산 지원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에게 들은 얘기다. 인간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는 새 가족의 탄생이란 기쁨이 걱정을 누르고도 남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아무리 출산의 벽이 높아도 인간 본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초저출산의 재앙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지금 대한민국은 수많은 난제 앞에 놓여 있다. 북핵 위협, 가계·기업·정부의 막대한 부채, 계층·세대·이념적 갈등, 글로벌 지정학적 갈등 속 국가진로문제 등등. 그러나 그 모든 문제를 압도하는 것이 인구감소다. 대한민국은 인류 역사 이래 매우 예외적인 초저출산 기록을 최근 매년 갈아치우고 있다. 세계 인구학자와 인류학자들에게 한국은 연구대상이다. 인구감소의 광범위한 부정적 영향은 새삼 거론할 바도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이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넋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벤처기업 사장은 지난 10월 10일을 기해 출산 관련 기업들과 산모들을 위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 날은 올해로 17회째를 맞는 '임산부의 날'이었다. 정부가 정한 법정기념일이다. 그런데 이날 정부 주관의 기념행사는 하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출산 정책을 관장하는 정부의 독임제 부처가 없다. 여성가족부일 것 같지만 천만에다. 관련 업무를 보면 출산의 '출' 자와도 관련이 없다. 보건복지부도 출산은 소관이 아니다.
정부 출산정책을 관장하는 곳을 들자면 대통령 직속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일 것이다. 여기도 장관급인 부위원장(위원장은 대통령)이 공석이었다가 지난 14일에야 나경원 전 의원이 임명됐다. 위원회가 2020년 12월 내놓은 것이 '제4차 저출산 기본계획'이다. 기본계획에 따라 작년부터 여성에게만 돌봄 부담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부모 모두 육아 휴직을 동시 또는 순차적으로 쓸 수 있는 '3+3 부모육아휴직제'를 도입했다. 임신출산 준비금, 의료비, 바우처로 임신에서 출산까지 총 700만원 상당의 일시 지원금 혜택도 준다. 영유아수당을 2세까지 월 30만원 지급한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이를 부모급여 형태로 2024년부터 1년 미만 영유아에게 월 100만원, 만 1세 자녀에겐 5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우선 내년에는 각각 70만원, 35만원으로 시작한다. 2자녀도 포함되는 다자녀 전용임대주택 2만7500호를 공급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럼에도 통계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 2분기 출산율이 0.75명이었다. 정책 효과가 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해도 충격적인 결과다. 모든 출산정책이 실패했으니 놀랄 것도 아니라는 자조도 나온다. 한국의 인구 재앙은 따지고 보면 실책이 빚은 인재(人災)다. 출산율이 1.5명으로 떨어진 1990년대 후반까지 산아제한정책을 유지한 것은 결정적 패착이었다. 이미 출산율이 OECD 저출산 기준(2.1명) 아래로 떨어졌고, 유럽 각국은 1980년대부터 출산장려로 돌아섰었다. 그러나 한국은 인구의 부(負)의 효과에 미혹된 공직자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한국적 초저출산 현상이 정책 실패의 결과라는 분석은 결코 틀린 지적이 아니다. 맬서스가 인구폭발을 예상했지만,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의 급격한 퇴장도 우려했다. 현재 2030세대의 출산기피 풍조에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예언이다.
국토가 텅 비어가는 망국(亡國)을 피하려면 출산만을 담당하는 독임제 기구를 속히 만들고 출산정책을 대통령이 직접 챙겨야 한다. 일본이 1억 인구 유지를 위해 설치한 총리 직속의 '1억총활약상'을 참고할 만하다. 그리고 '무식하다'고 핀잔을 들을지 모르지만, "출산으로 인생 역전했다"고 말할 만큼 경제 지원을 더 대폭 늘려야 한다. 그간 수백 조원을 쏟아 부었다지만, 출산율 회복에 어느 정도 성공한 유럽 각국에 비하면 적다. 경제적 토대가 갖춰진 연후에야 가족애란 인간 본성이 작동해 우리도 출산율 회복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집도 돈도 다 주는 게 망국보다는 낫지 않겠나.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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