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소줏값 인상 제동에도 대통령실 인근까지 서울 전역의 식당가 소주 한병 가격이 6000원에서 1만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업계에서는 도매상의 납품가 책정 등 유통구조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 없이 소주 제조사만 때려잡는 '보여주기식' 조치가 시장에 혼선만 가중시키고 있다고 정부를 비난했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용산구 이촌동의 한 일식집에서는 소주 한병 가격을 1만6000원으로 책정했다. 작년에 1만3000원에서 1만6000원으로 올린 이 식당은 정부가 소줏값 안정을 당부하든 말든, 이미 올린 가격을 다시 내릴 계획이 없다.
대통령 집무실로부터 반경 1㎞ 이내에 있는 용산구 한 주점의 경우, 지난 1월 중순께 소줏값을 5000원에서 6000원으로 올렸다. 이미 올린 소줏값을 내릴 계획은 현재로서는 없다는 설명이다.
종로구 내수동의 한 중식당 역시 6000원에 팔던 소주 가격을 최근 1000원 올렸다. 정부의 소주값 인상 억제 당부에도 이미 대통령 집무실 인근 음식점에서 판매하는 소주값이 일제히 오른 것이다.
이 식당 종사자는 "2월말에 갑자기 (소줏값을)올렸다"면서 "경영주가 본인이 운영하는 이 건물 식당들과 건너편 건물에서 운영하는 식당들까지 소주 가격을 7000원으로 올리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법인카드로 결제하는 손님이 많고, 3~4개 식당을 경영하는 다점포 사업자가 많은 서울 종로구 일대에는 최근 2주 사이 소주 가격을 올린 식당들이 적지 않았다. '식당 소줏값 6000원 시대' 우려에 정부가 가격 실태조사 카드까지 꺼내들었지만 식당가에서는 '우려'가 이미 '현실'이 된 상태다. 정부가 가격 인상 자제를 당부한 이후인 지난달 말에도 소주값을 올린 곳이 다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지난달 2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소주값 6000원 시대가 도래한다면 서민들과 직장인들에게 심리적 압박이 되지 않겠냐"는 질문에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면서 "소주 등의 품목은 우리 국민들이 정말 가까이 즐겨하는 것으로, 물가 안정엔 당국의 노력과 정책도 중요하지만 각계 협조가 굉장히 필요하다. 업계에서도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단골 손님들을 붙잡기 위해 소줏값을 올리지 않고 있던 식당들도 지난달 말부터 가격을 올리고 있다. 서울 강서구 등촌역 인근에서 만난 한 식당 주인은 "같은 상권에 있는 음식점들이 '너희는 왜 안올리냐'고 계속 항의를 하니 안 올릴 수가 없었다"면서 "버티다가 지난달 말에 4000원에서 5000원으로 가격을 올렸다"고 토로했다.
상황이 이러하자 식당가에서는 정부가 소줏값 안정의 방향타를 잘못 잡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용산구 한 주점의 업주는 "소줏값 안정은 제조사 출고가만 막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제조사 출고가가 안 올라도 주류 도매상에서 식당 납품가를 올려 받으니 식당으로서는 가격을 올리지 않을 재간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소주가 출고돼서 판매되기까지의 유통 체인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이 부분에 대한 검토 없이 지금처럼 제조사만 압박하면 서민은 결코 체감할 수 없는, 보여주기식 조치만 될 뿐"이라고 덧붙였다.
서울 시내 또 다른 식당 종사자는 "일부 도매상들은 친한 식당엔 납품가를 안 올리는 대신, 이를 상쇄하려고 안 친한 곳에서는 올려 받고 있다"면서 "이런 현실을 정부가 얼마나 알고 정책을 펼치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현장을 일일이 조사하는 게 어려우니, 가장 쉬운 카드로 제조사를 압박하는 것 아니겠나"고 덧붙였다.
한편 정부 당국에 따르면 기획재정부와 국세청은 주류업계의 소주 가격 인상 동향 관련 실태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필요시 주류회사의 이익 규모와 경쟁구조까지 살펴본다는 입장이다. 원부자재 상승 여파로 주류업계가 소주 가격을 인상할 경우 소비 심리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정부의 이 같은 압박에 하이트진로는 지난달 27일 "당분간 소주가격을 인상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글·사진 김수연기자 newsnews@dt.co.kr
지난달 말 소주 가격을 6000원에서 7000원으로 올린 서울 종로구 한 중식당의 주류·음료 메뉴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