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인텔 반도체 칩 개발보고 흥분… 컴퓨터 국내생산 꿈꿔
정부·기업에 지원 호소했지만 '재밌지만 꿈같은 얘기'로 치부해
연구소 나와 청계천에 '삼보'창립, 1년후 첫 PC '트라이젬'내놔
데이콤시절 초고속인터넷 첫 선… "좌절말고 한가지 몰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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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DT인] "정부 설득 10년 허송 안타까워… 그때 했다면 게이츠·잡스에 앞섰을 것"](http://contents.dt.co.kr/images/202310/2023100502109931650001[1].jpg "[오늘의 DT인] \"정부 설득 10년 허송 안타까워… 그때 했다면 게이츠·잡스에 앞섰을 것\"")
국내 첫 컴퓨터 개발 이용태 前삼보컴퓨터 회장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머리 속으론 20~30년 후가 훤하게 보였다. 나라의 미래를 바꿀 큰 꿈을 꿨다. 꿈을 펼치기엔 나라가 너무 가난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최초의 국산 컴퓨터를 개발하고 초고속인터넷 회사를 설립해 1999년 국내 기업 최초로 미 나스닥에 상장시켰다.
이용태(91·사진) 전 삼보컴퓨터 회장의 얘기다. 이 전 회장은 벤처붐이나 닷컴버블이 일기도 전에, 컴퓨터가 뭔지도 모르던 한국에서 컴퓨터 산업의 중요성을 외쳤다. 메아리 없는 외침에 지쳐 세운 회사가 삼보컴퓨터다.
그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타대에서 통계물리학 박사를 받은 후 이화여대 교수,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을 거쳐 1980년 삼보컴퓨터를 설립했다. 최초로 국산 컴퓨터를 개발해 IT와 벤처산업의 역사를 개척한 그는 1982년부터 1988년까지는 데이콤 초대사장을 지내며 국내 최초의 행정전산망 구축을 지휘했다. 이후 1996년 초고속인터넷 회사 두루넷을 설립해 1999년 나스닥에 상장시켰다. 삼보컴퓨터는 두루넷, 나래이동통신 등 30개 계열사를 둘 정도로 성장했지만 두루넷을 함께 세웠던 한전이 통신 자회사를 또 하나 만들면서 두루넷 주식이 폭락하고, 두루넷에 대출보증을 서줬던 삼보컴퓨터도 2005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만난 이 전 회장은 1971년 인텔이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내놨을 때 느낀 흥분을 마치 어제 일처럼 얘기했다. 그는 "인텔이 1970년 반도체 칩을 만들었다. 이전에는 전자기기를 만들려면 저항을 심고 트랜지스터, 콘덴서 등을 얹어서 '두들두들하게' 기판을 만들어야 했는데 전체를 손톱 만한 크기로 만든 거다. 처음 내놓은 것은 정보저장용 메모리 칩이었는데 다음해인 1971년에는 계산용 칩을 내놨다. 그걸 보고 흥분했다. 칩 두개만 있으면 컴퓨터가 되니 한국에서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인텔은 1968년 설립된 스타트업이었다. 막 시작한 벤처가 내놓은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세계 컴퓨터 산업을 뒤흔들 파괴력이 있었다. 마이크로컴퓨터 혁명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이 전 회장은 한국이 세계 1등 할 기회라고 봤다.
그는 "늘 새로운 산업을 만드는 것은 이미 자리잡은 대기업이 아니라 무명의 벤처기업이다. 처음 컴퓨터가 세상에 나왔을 때 모토롤러, 웨스팅하우스 같은 거대 전자기업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대신 컴퓨터 산업을 만든 곳은 IBM, 유니백 같은 당시 무명의 벤처기업이었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미니컴퓨터가 나왔는데, 이미 대기업이 된 IBM 등은 신경쓰지 않고 '이런 장난감을 누가 쓰냐'고 했다. 이후 DEC, 프라임 같은 기업이 미니컴퓨터 산업을 키웠다"고 말했다.
이 전 회장은 인텔이 내놓은 기술이 또 한번 컴퓨터 산업의 물줄기를 바꿀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주역이 한국 기업일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지금 시작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컴퓨터 회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KIST 전자계산실에 있을 때 컴퓨터를 국산화하자고 정부를 설득했는데 관료들이 '재미있지만 꿈 같은 소리'라고 일축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우리나라가 TV도 못 만들 때였다. 이 전 회장은 삼성과 금성(현 LG)에 가서 '연구비를 지원하면 국산화하겠다. 이후 당신들이 가져가서 팔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설득했다. 반도체 1세대인 고 강진구 삼성전자 회장이 이 전 회장을 달랬다.
"이 박사, 생각해봐요. 우리가 컴퓨터 사업을 하려면 먼저 기술을 도입해 만든 후 국내에서 팔아봐야 해요. 그래서 자신이 생기면 해외에 수출하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한테 기술을 줍니까. 안 줍니다. 설령 만들었다 쳐도 국내에서 누가 사겠어요. 안될 일이니 하지 마세요."
3년간 연구원 100명만 주면 세계 최고의 마이크로컴퓨터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혼자만의 외침이었다. 일부 기업이 관심을 보였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KIST 전자계산기국산화연구실장으로 있던 이 전 회장은 1977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연구팀과 함께 적을 옮겨 부소장이 됐다. 당시 세계은행에서 저개발국에 발전자금을 지원하는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의 한국 담당자와 뜻이 맞은 그는 한국에 반도체·컴퓨터 파일럿 플랜트를 세우는 일을 구상했다. 삼성·금성·대우 같은 기업이 신산업에 눈을 뜨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IBRD가 승인하고 돈도 대줬지만 우리 경제기획원이 요지부동이었다. 기계와 노하우, 컨설턴트를 사는 비용까지 IBRD가 지원했는데 우리 정부가 사무실, 공장에 드는 예산을 주지 않았다. 보다 못한 IBRD 담당자가 정부에 따졌지만 소용 없었다. 건물을 안 지어주니 뜯지도 못한 실험도구가 방치된 채 쌓여있었다.
10년간 애면글면 하던 이 전 회장은 1980년 연구소를 나와 삼보컴퓨터를 세웠다. 그는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와 기업 설득에 10년 세월을 보냈는데, 이제 직접 해야겠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앞으로는 벤처가 나라를 살릴 것이라고 본 그는 벤처 100개를 만들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그러나 당시는 벤처캐피털도 투자기금도 없었다. 은행도 담보가 없으면 대출을 안해줬다. 주머니 돈과 친구 돈으로 수천만원을 마련했다. 주변에선 누가 컴퓨터를 사냐며, 모두가 망할 거라고 했다.
![[오늘의 DT인] "정부 설득 10년 허송 안타까워… 그때 했다면 게이츠·잡스에 앞섰을 것"](http://contents.dt.co.kr/images/202310/2023100502109931650001[2].jpg "[오늘의 DT인] \"정부 설득 10년 허송 안타까워… 그때 했다면 게이츠·잡스에 앞섰을 것\"")
회사는 서울 청계천에서 직원 7명으로 시작했다. 1980년에는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전 회장은 "내가 시작하려 한 1970년엔 게이츠도 잡스도 대학생이었다. 그때 시작했으면 앞서갔을 거란 생각에 아쉬움이 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없었으면 대기업들은 그보다도 10년은 더 늦었을 거다. 국내 컴퓨터 산업 역사를 열었으니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삼보컴퓨터 창업 후 삼성·금성·대우·현대 등도 시장에 뛰어들었다. 회사는 1981년 1월 국내 최초의 PC를 내놓은 데 이어 '트라이젬' 브랜드로 가정용PC 시장을 열었다. 삼보는 컴퓨터의 본산인 미국에도 컴퓨터를 수출해 1997년 1조원 매출을 이뤘다. 2000년에는 4조원을 넘겼다. 이 전 회장은 전경련 정보산업협의회에서 시작해 1983년 독립한 한국정보산업연합회 최장수 회장이기도 하다. 1대 고 정주영 회장에 이어 2대부터 10대까지 회장을 맡았다.
이후 1982년 정부 주도로 설립된 데이콤(한국데이터통신) 초대 대표도 맡았다. 데이콤은 데이터통신에 특화된 기업으로 세워졌다.
당시 실리콘밸리로 넘어가 벤처투자 사업을 벌일 꿈에 부풀어 있던 이 전 회장은 데이콤 사장을 맡는 조건으로 정부 예산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국가 행정전산망을 구축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예비타당성 조사, 연도별 예산배정 절차 없이, 원하는 시스템을 다 구축한 후 사후정산 방식으로 비용을 받겠다는 것. 이게 받아들여지면서 일생일대의 프로젝트, 이 전 회장의 표현을 빌리면 '말도 안되는 짓'이 시작됐다. 이 전 회장은 "예산절차를 안 거치니 20배는 빨리 사업이 진척됐다. 대통령이 밀어주니 가능했다"고 했다.
그는 철저히 미래기술을 택했다. 당시 대세이던 IBM 메인프레임 대신 유닉스의 부상을 내다본 그는 막 대학 연구실에서 개발된 유닉스를 쓰자고 밀어붙였다. 또 엄청나게 비싼 IBM 메인프레임 대신 컴퓨터 기기도 국산화하겠다고 했다. 용량이 더 필요할 때마다 기기를 하나씩 추가하면 되는 모듈러 박스로 만들자고 했다.
벨연구소가 만든 유닉스를 쓰자고 하니 주변에선 미쳤느냐, 아무도 안 쓰는 OS를 왜 쓰냐고 했다. 모듈러 박스를 연동하는 것도 처음 해보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IBM 기기를 쓰면 200줄만 짜면 되는 프로그램을 유닉스를 쓰니 500줄 짜야 하니 프로그래머들은 일이 두배 이상으로 많았다. 다른 나라에서 코볼을 주로 쓸 때 C언어를 쓰고 IBM DB(데이터베이스) 대신 관계형 DB를 썼다. 외국은 더미터미널로 입력했다면 당시 PC로 입력하도록 만들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 전 회장은 "기적을 이뤄냈다.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어느 나라보다 10~ 20년 앞선 시스템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이 전 회장은 당시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엔지니어와 개발자들에게 집에 가서 이혼부터 하고 오라고 했다. 회사에 침대를 갖다놓고 잠도 여기서 자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보니 이혼한 사람은 한명도 없더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당시 완성된 행정전산망 덕분에 우리나라는 이후 UN 세계 전자정부 평가에서 1위를 휩쓸었다.
"한국이 여기까지 온 것은 사람들의 저력 덕분"이라는 이 전 회장은 반도체에도 비슷한 공식이 작동했다고 말했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 초석을 쌓은 강진구 전 회장이 이 전 회장에게 해준 얘기에 따르면, 정부가 64메가 D램 개발과제를 시작하면서 삼성, 금성 등에 연구비를 지원했을 때 삼성은 서울과 미국 실리콘밸리에 똑같은 연구소를 각각 만들고 양쪽 모두 일류 기술자들로 채웠다. 미국 연구자들은 경험이 있고 한국 연구자들은 처음 해보는 이들이었다. 그런데 데드라인을 정해주니 먼저 해낸 곳은 한국이었다. 이 전 회장은 "한국 사람들은 리더만 잘 만나면 어떤 어려운 과제도 해낸다"고 말했다.
두루넷 스토리에는 이 회장의 애환이 서려있다. 두루넷은 한전이 전국에 설치한 광섬유를 가지고 기간통신사업자로 허가받아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했다. 삼보컴퓨터와 한전이 지분을 투자한 이 회사가 국내 최초로 전화망보다 100배 이상 빠른 10Mbps 초고속인터넷을 내놓자 2001년 가입자가 100만명까지 늘었다. 1999년 11월 국내 최초로 나스닥에 상장한 두루넷의 시가총액은 한때 현대차와 LG전자를 합친 것보다 컸다. 이 전 회장 인생 최고 전성기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당시 한전을 여러 자회사로 쪼개면서 한전이 또 하나의 통신 자회사 파워콤을 출범시키니 두루넷 주가가 폭락했다. 두루넷이 자금을 빌릴 때 보증을 선 삼보컴퓨터도 2005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두루넷은 이후 하나로텔레콤에 인수됐다가 SK브로드밴드의 서비스 일부가 됐다.
이 전 회장은 "당시 대통령의 의지가 실린 일이니 깨끗이 포기했다. 꿈과 치열한 도전이 일장춘몽으로 끝났다"고 말했다.
![[오늘의 DT인] "정부 설득 10년 허송 안타까워… 그때 했다면 게이츠·잡스에 앞섰을 것"](http://contents.dt.co.kr/images/202310/2023100502109931650001[3].jpg "[오늘의 DT인] \"정부 설득 10년 허송 안타까워… 그때 했다면 게이츠·잡스에 앞섰을 것\"")
벤처 100개 설립을 꿈꿨던 그는 실제로 50개 가까운 회사를 세웠다. 그 중 대부분이 실패했지만 그가 뿌린 혁신의 씨앗은 대한민국 곳곳에서 뿌리를 내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 정보화 혁명의 대부로 불리는 그의 삶을 그린 '행파 이용태 평전'이 지난 7월 발간되기도 했다.
이 전 회장은 "실패하더라도 항상 미래를 보고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버틸 만한 최소한의 돈은 갖고 시작할 것을 조언했다.
"내가 도전할 당시엔 정부 지원도, 벤처투자 생태계도 없고, 은행 융자조차 담보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그런데 미래는 훤히 보이니 컴퓨터, 통신부터 전자상거래, 온라인교육, 의료시스템까지 보이는 것에 다 투자했다. 그런데 자본이 부족하니 한계가 있었다"면서 "요즘은 당시와 비교하면 창업하기가 매우 좋다. 아이디어와 기술이 있으면 쉽게 창업하고, 만약 실패해도 재기하고 또 도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될성부른 분야에 과감하게 투자하되 충분한 자본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 세대는 집안을 먹여살리며 없던 산업과 직장을 만들어내야 했지만 지금은 세계가 빨리 변하니 새로운 일거리가 무진장 있어요. '금자리' 깔려 있는 곳 가지 말고, 세상에 어려움이 많다고 좌절하지 말고 한 가지를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서 만들어 보세요."
이 전 회장은 한국의 다음 먹거리는 SW(소프트웨어)와 AI(인공지능)라고 꼽았다. 그는 1980년대부터 정부에 끊임없이 SW산업을 키우라고 주문했다.
그는 "인도가 SW로 대성공했는데 한 인도인 미국 교수의 조언을 인도 정부가 받아들인 게 그 출발이었다. 인도는 인구가 많고 머리 좋은 사람이 많은 데다 SW는 자본이 별로 없어도 할 수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이 전 회장은 2000년대 초반 정부에 SW 육성을 제안하러 갔다고 한다. 그러나 핸드폰이나 반도체 팔면 되지 SW가 무슨 소용이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제 모두가 깨달았다. 자동차부터 모든 것이 SW다. 현대차가 SW회사라고 주창하는 게 대표적"이라는 이 전 회장은 "이제 내가 잔소리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다음 승부처는 바로 SW와 AI"라고 했다.
안경애기자 naturean@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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