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방송통신위원장이 취임 6개월만에 자진 사퇴했다. 야당의 탄핵 소추로 인한 방통위 기능 마비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임 위원장인 이동관 전 위원장과 똑같은 상황이다. 방통위를 둘러싼 여야 간 갈등이 극에 치달으면서 방송·미디어 혁신 현안은 또다시 뒤로 밀렸다. 특히 2000년 초 제정된 통합방송법을 대체하는 통합미디어법을 제정해 지상파와 IPTV·OTT를 아우르는 법체계를 도입하려던 계획은 추진이 요원해졌다.
김 전 위원장은 2일 오전 대통령실에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를 즉시 재가해 이날 오전 퇴임식까지 진행됐다.
김 전 위원장은 퇴임사에서 사퇴 결정에 대해 "어려운 결정이었으나 거대 야당의 탄핵 소추라는 작금 사태로 국민의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방송·통신 미디어 정책이 장기간 멈춰서는 우려스러운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야당의 탄핵소추 시도는 헌법재판소의 최종적인 법적 반단을 구하는 것보다는 저에 대한 직무정지를 통하여 방통위의 운영을 마비시키고자 하는 정치적인 목적"이라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은 오는 4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 전 위원장의 탄핵소추안을 처리할 계획이었다. 탄핵이 추진되면 직무정지 상태가 돼 방통위 업무가 마비될 수밖에 없다.
이동관 전 위원장도 지난해 12월 민주당이 주도한 탄핵소추안 표결 직전 사퇴한 바 있다.
방통위는 본업이 정쟁에 밀린 지 오래다. 지난해 5월 말 한상혁 전 위원장이 방송사 재승인 심사 과정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돼 면직된 후 김효재 전 상임위원이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으며 3인 체제로 이어지다가 김 위원이 퇴임한 후에는 이상인 현 부위원장이 직무대행을 맡았다. 이후 이동관 전 위원장이 취임해 2인 체제로 운영되다가 3개월여만에 사퇴하면서 이 부위원장이 다시 직무대행을 맡았다. 이번 김 전 위원장의 사퇴로 이 부위원장은 세 번째 직무대행을 수행하게 됐다. 다만 이 부위원장이 유일한 위원인 만큼 주요 정책에 대한 의결이 불가능한 '식물' 상태다. 문제는 상황 개선이 요원하다는 것이다. 방통위원장이 새로 임명돼도 MBC를 비롯해 공영방송 이사 선임이 2인 체제에서 이뤄지면 언제든 야권이 위원장에 대한 탄핵소추를 발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연말에는 MBC 등 지상파 재허가 이슈도 있어 정쟁은 더욱 격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 가운데 방송·통신·플랫폼 등 산적한 현안은 방치되고 있다. OTT·유튜브·모바일 등 사실상 방송과 다를 바 없는 플랫폼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방송·미디어 법제는 공백상태다. 방송법은 지난 2000년 통합방송법 제정 후 정쟁에 묶여 별다른 변화 없이 기존 틀에 머물러 있다. 그간 정부와 국회는 달라진 시장 상황을 반영한 규제체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에 따라 방송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김 위원장은 기존 방송·미디어와 OTT를 아우르는 통합미디어법 추진 의지를 밝혔지만 성과 없이 임기를 끝냈다. 통합미디어법은 방송법과 IPTV법, OTT를 관할하는 전기통신사업법 등 신구 미디어 관련법을 정비해 통합 입법하는 것이 골자다. 유료방송 업계의 숙원인 콘텐츠사용료 대가산정 제도 개선도 과제다.
구글·애플의 인앱결제 강제 금지법 위반에 대한 과징금 부과 확정과 네이버 뉴스 알고리즘 사실조사 결과, 국내 OTT 산업 활성화 방안 등 현안도 하염없이 처리가 밀리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 일본, 유럽 등은 디지털 질서 정비를 위한 법안 정비를 서두르는데 우리나라는 손도 못 대고 있다"며 "정쟁을 위한 꼬투리 잡기식 법안만 난무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여야 3대 2라는 정치적 구도로 인해 바람 잘 날 없는 방통위 구성과 역할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방송의 '공영성'을 관리하는 부처를 따로 두고 산업 규제와 진흥을 집중해 보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용희 오픈루트 연구위원은 "정책 목표를 '지속성'에 맞추고 글로벌 사업자들과 어깨를 맞대고 경쟁할 수 있는 산업 시스템이 필요하다"면서 "자율성을 주고 시장 입퇴출이 자유롭게 돼야 경쟁에서 살아날 수 있다. 국회가 바람직한 미디어 산업 밑그림을 제시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