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 산업부장
![[박정일 칼럼] 위기의 삼성 반도체, 다시 `도전`이다](http://contents.dt.co.kr/images/202410/2024101402102269781001[1].jpg "[박정일 칼럼] 위기의 삼성 반도체, 다시 `도전`이다")
삼성은 2018년에 4대 성장사업으로 인공지능(AI), 5세대 이동통신(5G), 바이오, 반도체 중심 전장부품을 꼽았다. 최근 삼성 반도체의 위기는 바로 그 AI용 반도체 시장에서의 '실기'(失機)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3분기 실적만 놓고 봐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률은 10%포인트 안팎까지 차이가 날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차이는 AI용 고대역폭메모리(HBM)다. 삼성이 HBM 시장에 적기 대응하지 못한 것은, 자동차로 비유하면 하이브리드차를 건너뛰고 전기차로 넘어가려다 위기를 맞게 된 폭스바겐과 유사하다.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으나, 전략적 판단 미스였다.
HBM의 성장 과정과 삼성의 행보를 보면 그럴 만도 했다. HBM은 SK하이닉스가 11년 전 AMD와 공동 개발한 기술로, D램 칩에 수천개의 구멍을 뚫어 연결하는 방식으로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을 늘리는 방식이다. 고속도로로 비유하면 1차선 도로를 8차선 또는 12차선으로 늘려 교통을 원활하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초기에는 일부 서버·그래픽 시장에서만 수요가 있었기에 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 정도까지만 해도 1% 안팎이었다.
당시 비메모리 사업 강화에 집중하고 있던 삼성이 크게 신경쓸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삼성이 손 놓고 구경만 한 것도 아니었다. 2015년에 삼성 역시 SK하이닉스와 함께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에 HBM2를 공급하는 등 경쟁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주력은 아니었다. 삼성은 HBM보다는 CXL(컴퓨트 익스프레스 링크)나 자기저항메모리(M램)와 같은 포스트 D램 신기술에 주력했다. 해당 제품들은 아직 양산 전이거나 시장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 와중에 AI 시장이 예상보다 빨리 열렸고, 시장은 당장 투입할 수 있는 HBM을 택했다. 세계 메모리 시장의 40% 안팎을 차지하던 삼성이었지만, 결국 시장의 흐름에 올라타진 못했다.
기술에 정답은 없다. 과거 미국을 중심으로 한 CDMA 계열과 유럽 중심의 GSM 간 이동통신표준 경쟁, 삼성 내부에서도 불붙었던 PDP와 LCD 간 차세대 디스플레이 주도권 다툼, 하이브리드차와 전기차, 수소연료전지차 간 친환경차 주도권 경쟁 등을 보면 결국 답은 시장에서 나왔다. 단순히 기술적 우위로 승패가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또 절대적인 우위를 보이는 기술이 나오지도 않기에 정답은 없다. 엔비디아가, HBM이 이렇게까지 시장 대세로 자리잡을지 삼성 반도체 개발자들이 미처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억울할 일이다.
그럼 삼성은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할까. 먼저 제안하고 싶은 것은 AI 반도체 대전에서 1차전은 패배했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당장 3분기 실적이 부진하고, 그리고 4분기에도 극적인 반등을 기대하긴 어렵다. 둘째는 '초격차'와 '관리'의 삼성이라는 키워드를 버리고, 다시 '도전자'의 자세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바람을 타고 삼성이 한 때 세계 반도체업계 1위를 한 적이 몇 차례 있었지만, 이는 삼성의 힘이라기 보다 시장의 흐름이 더 컸다. 과거에도, 지금도 삼성은 도전자다.
삼성의 반도체 선배들이 보여준 '할 수 있다'의 DNA를 다시 살리라고 조언하고 싶다. 미국과 일본보다 27년 늦은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시작한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내·외부의 반대와 냉소, 그리고 실적부진으로 고전했다. 그러나 1983년 2월 8일 이병철 창업주의 '우리는 왜 반도체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선언문을 시작으로 같은 해 5월 64K D램 개발에 착수했고, 그 해 12월 국내 최초 개발에 성공하는 전광석화와 같은 기적을 보여줬다. 그룹 총수부터 직원들까지 하나로 뭉쳤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지금 삼성에 필요한 것은 '실리콘밸리' 따라하기가 아닌 삼성만의 이런 '도전정신'일 지도 모른다.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의 실적 부진에 대한 '솔직한 사과'가 그 시작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산업부장
[ 저작권자 ⓒ디지털타임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