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1년 새 상황이 급 반전했다. ASML의 실적은 사실상 삼성전자 등 반도체 제조업체들의 향후 투자와 매출 성장세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 격이다. AI를 빼면 결국 '반도체 겨울론'이 맞다는 해석도 나온다.
15일(현지시간) ASML의 3분기 예약 매출은 26억유로(약 3조8600억원)로 시장 전망치(56억유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ASML은 고객사의 주문을 받은 뒤 맞춤형으로 장비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매출을 창출한다.
ASML은 첨단 반도체 제조 공정에 반드시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공급하는 업체다. ASML의 예약 매출이 줄었다는 것은 세계 반도체 업계의 생산라인 증설 움직임이 위축됐다는 것을 뜻한다.
ASML은 실적 부진 이유로 반도체 내 인공지능(AI) 분야를 제외한 다른 부문의 침체를 들었다. 크리스토프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는 "AI 분야는 강력한 성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로직·메모리 등 다른 부문은 회복에 시간이 더 걸리고 있다"며 "메모리 분야에서도 설비용량 확대는 제한적이며, 기술 전환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DDR5 등 AI 관련 수요에서만 집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범용 D램 반도체 가격은 최근 들어 하락하는 추세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 범용제품의 9월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전월보다 17.07% 내리며 지난해 4월(-19.89%)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글로벌 PC 시장에서 수요가 줄어든 영향이다.
또 다른 범용 메모리인 낸드플래시 가격도 떨어졌다. 메모리카드·USB향 범용 제품(128Gb 16Gx8 MLC)의 고정거래가격은 4.34달러로 전월(4.90달러) 대비 11.44% 감소했다. 트렌드포스는 "PC 업체들이 D램 재고 수준을 낮추는데 집중하고 있어 4분기에도 D램 수요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ASML의 이 같은 실적을 보면 주요 고객사인 삼성전자와 인텔 등의 투자 속도가 늦춰졌다는 해석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최근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 회복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파운드리 사업에 대한 투자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평택 4공장(P4)에 당초 예정했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가 아닌 메모리 라인을 증설할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전영현 부회장을 필두로 반전을 약속했지만, AI를 제외한 반도체의 수요는 감소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엔비디아 등에 대한 HBM 신제품의 납품이 늦어질 수록 실적 회복 시점도 멀어진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순원기자 ssun@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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