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21세기 글로벌 패권 경쟁의 중심에 서면서 'AI 냉전'이 격화되고 있다. AI는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국가 안보와 경제, 군사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는 20세기 중반 핵무기를 둘러싼 국제적 경쟁과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미국은 AI 기술을 '21세기의 핵'으로 간주하며, 글로벌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방위적인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AI 칩 수출 규제, 동맹국과의 협력 강화, 자체 기술 생태계 보호 등 다양한 조치가 이러한 전략의 일환으로 실행되고 있다.
◇"핵심 우방과만 AI 공조"…AI칩 수출 막는 미국
미국 정부는 전 세계 국가를 우방국·적대국·기타 3개 등급으로 나눠 소수 우방국만 미국산 AI 반도체를 제한 없이 수입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담은 AI칩 수출 규제정책을 조만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중국·러시아·북한·이란·베네수엘라·쿠바·벨라루스·이라크·시리아 등 미국의 적대국으로 분류된 20여 개국은 AI칩을 수입할 수 없도록 이들 국가에 대한 수출 경로가 차단된다. 100여 개의 중간 등급 국가는 수입 가능한 총 연산력(컴퓨팅 파워)에 상한이 설정된다. 한국·일본·대만·영국·프랑스 등 소수의 주요 우방국은 지금처럼 미국산 반도체를 제한 없이 구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치 이전에도 미국은 중국으로의 첨단 반도체 칩 수출을 제한해 왔다. 2022년부터 주요 반도체 제조사들에게 중국에 대한 고성능 AI 칩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했으며, 2024년에는 이를 더욱 강화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엔비디아, AMD와 같은 기업들은 중국으로의 수출이 제한되는 주요 대상에 포함됐고,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관련 소프트웨어의 중국 수출은 사실상 전면 금지됐다. 바이든 정부가 조만간 발표할 것으로 알려진 AI칩 수출 규제정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우방국 중심으로 AI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MS 빙 이미지크리에이터를 이용해 생성한 이미지.
◇반발하는 빅테크들 "미국 경제에 해"
미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엔비디아·MS 등 빅테크들은 미국 정부의 AI칩 수출 통제 확대 움직임에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미국의 핵심 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AI반도체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엔비디아는 강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다. 네드 핀클 엔비디아 글로벌 업무 담당 부사장은 "바이든 행정부의 막판 정책은 미국 산업과 세계 사회에서 비판 받을 유산이 될 것"이라며 "우리는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경제에 해를 끼치고, 미국을 후퇴시키고, 적대자들의 손에 놀아날 뿐인 정책을 제정해 트럼프 대통령의 앞길을 막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구글·MS·아마존 등을 대변하는 정보기술산업위원회(ITIC)도 목소리를 냈다. 켄 글릭 오라클 부회장은 "미국 기술 업계를 타격한 역대 가장 파괴적인 규제로 기록될 것"이라며 "업계와 협의 없이, 행정부가 바뀌기 불과 며칠 전 이런 규모의 규칙을 비밀리에 발행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안보도 경제도 AI로 통한다
미국 정부의 행보는 AI 기술이 단순히 민간 산업에서의 혁신을 넘어 군사적 및 감시 기술로 전환될 수 있는 잠재력을 염두에 둔 것이다. AI가 드론 제어, 자동화 무기 시스템, 사이버 전쟁 등의 군사적 활용도가 높아, 이를 제어하지 않을 경우 글로벌 안보 구조가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AI 칩은 대규모 데이터 처리와 고속 연산을 가능케 하는 AI 모델의 핵심 자원이다. 중국의 AI 연구는 이 고성능 칩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칩들은 대부분 미국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의존성을 전략적 카드로 활용해 중국 AI 생태계의 성장을 억제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바이든 행정부가 발표하려는 이번 정책의 목표는 중국이 동남아시아와 중동과 같은 지역의 데이터센터를 활용해 AI 칩에 액세스할 수 있는 허점을 막는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동맹국들에게는 제한 없이 칩을 수출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동맹국 간 AI 기술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미국 주도의 기술 생태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글로벌 기업들이 미국의 기준을 따르도록 유도하는 전략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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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핵 경쟁과 유사한 AI 냉전
20세기 중반,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개발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미국은 1945년 첫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며 전후 국제 질서를 주도할 수 있었고, 이는 핵무기 기술의 독점이 가능했던 덕분이었다. 소련은 1949년 핵무기 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과의 핵 경쟁을 본격화했고, 이로 인해 냉전이라는 장기적 대립 구도가 형성됐다.
AI 기술 경쟁 또한 이와 비슷한 특징을 보인다. 21세기 들어 AI는 단순한 기술적 혁신을 넘어 국가의 전략적 자산으로 떠올랐다. 핵무기가 군사적 억지력을 상징했다면, AI는 정보와 자동화된 무기 시스템을 통해 현대 군사 전략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AI를 활용한 자율 무기 체계, 사이버 공격 기술, 감시 체계는 AI 기술에서의 격차가 곧 군사적 우위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AI 기술력의 독점을 통해 글로벌 패권을 유지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미국 따라잡겠다"…중국의 AI '굴기'
미국과 중국은 현재 AI 기술 경쟁에서 양강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미국은 딥러닝, 자연어 처리(NLP), 생성형 AI 기술 등 AI의 핵심 기술 분야에서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다. 구글, 오픈AI, 메타와 같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AI 연구 및 상용화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오픈AI의 챗GPT는 생성형 AI 기술에서 미국이 세계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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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중국은 대규모 데이터와 정부 주도의 연구 개발을 바탕으로 AI 분야에서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텐센트, 알리바바, 화웨이와 같은 중국 대기업들은 자체 AI 칩 개발과 데이터센터 확장을 통해 기술력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 알리바바는 오픈AI의 GPT 모델에 필적할 수 있는 새로운 AI 모델을 발표하며 기술적 진보를 과시했으며, 텐센트는 자체 개발한 오픈소스 AI 모델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수출 규제는 중국의 기술 발전 속도를 둔화시키는 중요한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화웨이는 2024년 자사 스마트폰에 국산 AI 칩을 탑재하며 기술 자립을 강조했지만, 성능 면에서 여전히 미국산 칩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는 미국이 20세기 핵 기술에서 주도권을 유지했던 것처럼, AI 기술에서도 중국의 추격을 차단하겠다는 전략이다.
◇중국, AI 연구 논문 수 미국 앞서
중국은 AI 관련 연구활동에서 미국을 맹추격하고 있다. 9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3대 AI 학회인 신경정보처리시스템학회(NeurIPS), 국제머신러닝학회(ICML), 표준학습국제학회(ICLR)에 채택된 논문을 저자와 소속 연구 기관 등으로 분석한 결과 저자 수가 많은 상위 10개 기관에 미국이 6곳, 중국이 4곳 포함됐다.
1위는 미국 구글, 2위는 중국 칭화대, 3위는 미국 스탠퍼드대가 각각 차지했다. 미국은 구글 이외에도 마이크로소프트가 8위, 메타가 10위를 차지하는 등 빅테크가 강세를 보였다. 중국은 공동 6위인 베이징대와 저장대, 9위 상하이자오퉁(교통)대 등 10위에 포함된 4곳 모두 대학이었다.
지난해 상위 50개 기관의 채택 논문 저자 수를 국가별로 보면 1위 미국은 1만4766명, 2위 중국은 8491명이었다. 닛케이는 2020∼2024년 3개 학회 논문 약 3만편을 분석한 결과 미국과 중국의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2020년 시점에서는 미국이 상위 기관 1∼7위를 휩쓸었고 상위 20위 가운데 13개를 차지하는 등 미국 1강 체제였으나 중국이 단기간에 실력을 키웠다. 중국은 2030년 AI 분야에서 세계를 이끈다는 '차세대 AI 발전 계획'을 2017년 발표하며 정부 차원에서 AI 연구를 뒷받침해 왔다. 그 결과 칭화대와 베이징대 등이 이 기간 채택 논문 저자 수를 3∼4배로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이 AI 기술 수준과 산업 응용 측면에서 우위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연구 논문 생산과 특허 출원, 인재 배출에서 강점을 보이면서 두 나라의 경쟁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공조와 자국 생태계 구축…'양손잡이 정책' 펴는 국가들
AI 냉전은 단순히 미중 간의 대결로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EU)은 자체적인 AI 규제와 산업 육성 전략을 통해 독립적인 기술 생태계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일본, 한국, 인도와 같은 국가들도 AI 기술 개발을 국가적 핵심 과제로 삼으며,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거나 독립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AI 기술의 발전은 윤리적, 사회적 문제를 동반한다.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되는 AI 기술이 국제법 및 인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20세기 핵 확산 방지를 위해 설립된 국제적 규제 기구와 유사한 형태의 글로벌 거버넌스 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AI는 21세기의 핵과 같은 파급력을 가지며 글로벌 패권 경쟁의 중심에 서 있다. 미국은 AI 기술의 독점을 통해 군사적, 경제적 우위를 공고히 하려 하고 있으며, 이는 냉전 시대의 핵무기 경쟁과 많은 공통점을 보인다. 하지만 AI 기술은 그 범용성과 글로벌 의존성으로 인해 단순히 한 국가의 독점이 아닌 다자적 협력과 규제 모델이 요구된다. 향후 미중 간 AI 냉전이 세계 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국제사회가 이를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글로벌 패권 변화로 이어질 전망이다. 다가올 시대에는 AI 기술의 책임 있는 사용과 균형 잡힌 발전을 위한 협력적인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안경애기자 naturean@d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