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부, 인사 지연·주요 정책 표류·경제 위기 3중고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촉발된 미증유의 사태가 50일이 가까워지면서 행정부는 외형상 안정된 모습을 찾아가는 듯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뒤숭숭하다. 트럼프 2기 출범과 맞물려 리스크가 더욱 커진 가운데 제주항공 참사가 겹치면서 과부하가 걸릴 대로 걸렸다. 공직자들의 힘이 빠져가고 있고, 정책 추진의 동력 역시 크게 약화됐다.
▨계엄 후폭풍 여전…늑장 인사에 사기 뚝
통상 연말쯤 이루어지던 각 부터 주요 인사는 예년에 비해 10여일 이상 늦게 시동이 걸리는 분위기다. 다만 부처 별로 국·과장 인사가 있을 뿐 조직에 긴장감이나 활력을 불어넣는 파격 인사는 눈에 띄지 않고 있다. 기획재정부의 경우 지난 주 최상목 권한대행을 전담 보좌하는 '장관 보좌 태스크포스'(TF)를 보강하면서 국장급 인사를 단행했다. 이어 다른 국장급도 시차를 두고 인사가 진행 중이다. 행정안전부도 최근 부지사를 포함한 지방자치단체 국장급 인사를 단행하는 등 실·국장급 승진·전보 인사에 조금씩 속도를 내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수시로 인사를 하고 있고, 산업통상자원부는 소규모 인사수요에 따른 과장급 인사를 정상적으로 하고 있다. 국토교통부도 실장급 승진 인사와 국·과장급 전보 인사를 진행하고 있다.
공공기관장 임명과 선임은 줄줄이 지연되고 있다. 1년 가까이 공모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도 적지 않다. 특히 장·차관을 비롯한 정무직 인사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 장관이 공석인 부처는 국방부, 행안부, 여성가족부 3곳. 여당 지도부는 안보·치안을 책임지는 국방부·행안부 장관 임명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여소야대에서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부처 장관을 지명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특히 대행의 대행체제에서 인사권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을 키울 수 있다는 부담이 크다. 정무직 인사와 직결된 1급(차관보급) 인사도 덩달아 쉽지 않은 기류다. 이에 따라 1년 가까이 장관 공백이 이어지는 여가부는 물론 국방부와 행안부 모두 당분간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고위직 인사 역시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공직사회는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따른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의 '학습 효과'가 없지 않지만 당시 보다 상황이 더 악화됐다는 게 문제다. 45년만의 계엄 사태로 당혹감과 불안이 숙지지 않고 있고, 윤 대통령이 구속까지 되면서 정상화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해 보인다. 공직자들의 의욕과 사기도 떨어져 가고 있다.
▨4대 개혁·주요 정책 줄줄이 좌초 위기
정부의 주요 민생정책과 개혁과제들은 올 스톱 되다 시피 했다. 의료·연금·노동·교육 등 이른바 '4대 개혁'이라는 윤 정부의 핵심 과제는 탄핵 정국으로 인해 논의가 수면 아래로 잦아들었다. 연금개혁은 지난해 20년 만에 발표된 정부안이 표류 중이다. 전문가들은 기금 고갈 문제 등을 경고하며 조속한 논의 재개를 촉구하고 나섰지만 국회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윤 대통령 수사나 탄핵이 현실화 되면서 올해 대선, 내년 지방선거, 2028년 총선 등 선거가 이어질 경우 연금 개혁 논의를 위한 골든타임을 놓치게 된다는 우려가 나온다.
교육개혁도 마찬가지다. 유아 교육과 보육을 통합하는 이른바 '유보 통합'은 동력을 잃은 상태다. 정부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으로 나뉘어 있는 영유아에 대한 보육 기능과 교육 기능을 하나로 합치는 유보 통합에 대해 올해 법제화를 끝내고, 내년부터 본격 시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예정됐던 실행 계획 발표 단계부터 막히면서 시행 가능성은 가물가물해졌다.
탄력이 붙었던 노동 개혁도 벽에 부딪혔다. 노동조합의 회계 투명성 강화 등은 기약하기 어렵게 됐고, 최저임금 결정 구조 개편은 올해 고용부 업무 보고에서 빠졌다. 지지부진한 정년 연장 논의도 결실을 낳을지 불투명하다.
4대 개혁은 물론 윤 정부의 국정 과제가 줄줄이 실종됐다. 국토부 새해 업무 보고 페이퍼에 '재건축 초과 이익 환수제 폐지'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 폐지' '임대차 2법 정상화' 같은 부동산 시장 정상화 정책은 올라가있지 않았다.
원전 생태계 회복을 외친 윤 정부의 신규 원전 4기 건설은 3기로 줄었다. 산업부는 4기 건설을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초안에 넣었지만 야당의 반대로 인해 1기를 줄이는 대신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는 수정안을 마련해야 했다. 저출생·고령화 대응을 위해 신설하겠다고 한 인구전략기획부도 먹구름이 끼었다. 한국은 지난해 말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지만, 인구문제를 총괄할 인구부 신설 작업은 기약없이 표류하고 있다. 국민의 힘이 발의한 정부조직법 개정안과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개정안은 나란히 국회에서 6개월째 계류 중이다.
▨경제 안정 올인 속 트럼프 2기 등 난제
조기 대선 가능성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공직사회가 중심을 잡고 소신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리 없다. 정책 콘트롤 타워가 제 힘을 내기 어려운 구조에서 추진력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불확실한 정치적 상황에 따라 고위직의 압박감이 커지고, 실무진의 사기는 떨어지고 있다.
정부는 계엄 사태 이후 일관되게 정부 정책과 구조개혁은 흔들림 없이 이어간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최상목 권한대행은 권한대행 지명 이전부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김병환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과 함께 잇달아 거시경제·금융현안 간담회를 열고 "최근 정치 상황과 관계없이 그간 정부가 추진해오던 산업경쟁력 강화, 외환·자본시장 선진화 등 중장기 구조개혁 정책들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혀왔다.
최 권한대행은 또 2025년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평시 업무와는 달리 절박함과 해법, 추진 속도 등 모든 면에서 확 달라진 면모를 주문했다. 특히 "정치적 불확실성 속에서 국민과 우리 기업들이 노심초사하고 있다"며 당면 현안에 대한 실질적 해법 제시와 우려 불식을 강조했다.
정부는 먼저 회복 조짐이 더뎌지는 내수 시장을 회복하기 위해 전체 예산의 75%를 상반기에 조기 집행하는 방안을 밀어 붙이고 있다. 전체 세출예산 574조8000억원 중 431조1000억원을 상반기에 배정하고, 서민 생계부담 완화, 취약계층 지원 등 사회적 약자 지원과 소상공인 맞춤형 지원, 첨단산업 육성 등 경제 활력 확산에 나서겠다는 의지다. 지자체 보조사업의 신속 집행을 지원하고, 부처 집행 자율성을 확대하는 내용도 들어가 있다.
실제로 지난 2일 기재부는 민생사업 발굴 집행을 위해 3306억원을 집행했다. 이는 회계연도 개시 첫날로 보면 역대 최대 규모다. 새해 1호 집행사업은 500억원의 온누리 상품권 사업과 200억원의 청년 월세 한시지원, 155억원의 노인일자리 사회활동지원 등이다.
하지만 정치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트럼프 2기 출범에 따른 리스크가 커 어느 정도 약발이 먹힐지는 미지수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상황일수록 공직자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하혜수 경북대 행정학과 교수는 "역대 정권은 공직자들이 묵묵히 철저하게 일하도록 해주는 등 관료를 보호하는 분위기였다"라며 진영 논리가 확산되면서 정권의 눈치를 보게 하는 조직문화가 만들어진 데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보면 정국 상황으로 인해 과도한 지시나 압박 같은 외풍이 줄어드는 만큼 소신을 갖고 민생을 챙기는 일부터 주력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세종=송신용기자 ssyso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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