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어요. 인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공간의 제한을 뛰어넘고 싶었죠."
21일 저녁 서울 양재동 한 갤러리. 조선시대 유명 화가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몽환적인 작품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세월의 풍상에 시달린 바위들이 구름인 듯, 안개인 듯 알아보기 힘든 그 무엇에 둘러싸여 마치 꿈속의 풍경처럼 다가왔다. 공중에서 바닷가 바위에 부딛혀 부서지는 파도를 담은 모습은 사진인 것 같기도, 그림인 것 같기도 했다. 캔버스지에 옮겨진 풍경은 추상화가가 격정적인 예술적 감성을 담아내 그린 것 같았다.
이날 전시의 주인공은 삼성전자 메모리 신화의 주인공 중 한명인 전동수(사진·66) 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사장)이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막 시작한 1983년 입사한 그는 입사 직후 미국 실리콘밸리로 파견돼 2년간 현지 전문가들과 함께 256K D램을 개발했다. 1983년은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이 반도체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공표한 '2·8 도쿄선언'을 한 해다. 미·일이 최선두를 달리는 반도체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막 걸음마를 시작한 상태였다.
전동수 전 대표가 드론과 카메라 장노출 기법으로 찍은 사진.
전 전 대표는 한국으로 돌아와 1M, 4M, 64M D램 설계와 개발을 담당하며 반도체 성공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는 4M D램 개발은 미·일보다 1년 정도 늦었지만 64M D램은 1992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후 256M D램도 최초로 개발하고 세계 메모리 1등에 올라섰다. IMF 외환위기 이후엔 삼성전자 미래전략그룹에서 디지털 컨버전스 전략을 수립하고 사업구조를 디지털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메모리사업부 사장, 한국반도체협회 회장을 지낸 데 이어 삼성SDS 대표와 삼성메디슨 대표를 역임했다. 지난해에는 전직 삼성전자 고위직 임원들과 함께 초기 스타트업을 발굴해 키우는 전문가그룹 '아브라삭스'를 설립했다.
2020년 고문으로 현직에서 물러난 그는 지난 5년간 '인생3막'에 도전하며 사진촬영의 세계에 빠져 빚어낸 작품들을 이날 세상에 내보였다. 5년간 스스로를 찾아가는 여정과 사진촬영을 통해 경험한 것들, 삶에서 얻은 깨달음을 사진작품들과 함께 녹여넣은 저서 '원하는 대로, 원 없이-익숙함을 넘어서'도 이달 20일 펴냈다. 전 전 대표의 책과 작품들을 함께 선보이는 자리에는 삼성전자와 삼성SDS 전·현직 인사들도 찾아 축하했다.
이날 전 전 대표는 "서른살까지는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을 잘 듣는 모범생으로 살았다. 그 다음은 가정과 자신을 버리고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퇴 후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제는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내가 원하는 것을 되새기고 지향하는 기능이 퇴화돼 버린 것"이라면서 "나를 찾아가는 것이 꽤 긴 여정이었다"고 밝혔다.
전동수 전 대표가 드론과 카메라 장노출 기법으로 찍은 사진.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되짚어보기 위해 학창시절 12년간 생활기록부를 떼서 들여다봤다. 학창시절 받은 상장들도 봤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좋아하는 일에 몰입해서 행복한 인생 3막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인문학적 소양과 적성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1년 정도 드럼을 신나게 쳤어요. 스트레스 풀리고 좋았죠. 이후엔 스킨스쿠버와 요리에도 도전했죠. 그러다 장자의 말씀을 떠올렸어요. 인간이 진정한 자기혁신의 길로 들어서려면 시간과 공간의 덫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거죠."
시공간을 벗어나는 구체적인 방법을 고심하던 그는 자신의 속에 숨어있는 창작욕을 일깨우기로 했다. 산업현장에서 일사불란한 목표 달성을 위해 뛰다 보니 사치에 불과했던 창작활동에 자신을 던져넣기로 한 것이다.
그는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이나 자연이 몇초나 몇분, 몇 시간 동안 바뀌는 모습을 누적해서 보는 방법이 카메라의 장노출 기법"이라며 "카메라는 일반적으로 250분의 1초라는 찰나의 노출시간을 통해 포착된 모습을 담는데 빛의 양을 조절하고 노출시간을 조절하면 아주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수학적 관점에서 보면 움직이는 사물의 이미지를 시간에 따라 적분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이 이날 갤러리에서 빛을 봤다.
무거운 일반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던 그는 성능에서 뒤지지 않는 스마트폰 3대로 장비를 교체했다. 삼성 갤럭시 폴드와 갤럭시S23, S24를 자신이 맞춤 제작한 삼각대에 고정시켜 촬영한다. 드론도 촬영에 동원한다. 장노출 기법으로 시간을 극복했다면 드론은 공간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전 전 대표는 "드론의 매력은 굉장하다. 마치 새처럼 세상을 볼 수 있다"며 "제주도 주상절리, 강원도 계방산 운두령의 사계절 등 직접 찍기 힘든 자연을 포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드론촬영에도 장노출 기법을 적용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드론에 달린 카메라로 장노출 사진을 찍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죠. 해보니 상상하지 못한 결과물이 나오더군요. 분당 중앙공원 호수를 공중에서 장노출로 찍었더니 마치 민들레 홀씨나 분자 구조 같은 사진이 탄생했어요."
그는 "두가지 취미를 결합해서 상상못한 결과를 얻은 것"이라면서 "1 더하기 1이 2가 아니고 11이 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국내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이 20%, 2035년에 30%가 되는데, 이들이 창조적인 활동과 봉사를 통해 사회에 기여했으면 하는 생각에 전시회와 저서 출간을 결심했다고 한다. 책은 당분간 출판사 트래블그래픽스에서 주문을 통해 판매할 예정이다.
전동수 전 대표가 드론과 카메라 장노출 기법으로 찍은 사진.
본인도 미처 몰랐던 창의력와 창작 의욕이 쉼없이 샘솟아 몰입의 행복에 빠져 있는 그는 "인간은 행복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에 몰입할 때 행복을 느낀다"면서 "경험해본 결과 몸이 기억하는 게 정말 좋아하는 거다. 머릿 속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알기 힘들다. 은퇴 후 수십년 남은 인생 3막을 어른으로 사느냐, 노인으로 사느냐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찾아서 하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사느냐에서 결정된다"고 말했다. 글·사진=안경애기자 naturean@d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