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손님보다 상인 더많아
"활기도 없고 덕담도 사라져"
고물가 장기화가 지갑 닫게해
불확실성으로 소비 회복 난망
"활기도 없고 덕담도 사라져"
고물가 장기화가 지갑 닫게해
불확실성으로 소비 회복 난망
![[설대목 르포] "소비, 빙하처럼 얼어붙었다"](http://contents.dt.co.kr/images/202501/2025012402100151102001[1].jpg "[설대목 르포] \"소비, 빙하처럼 얼어붙었다\"")
"220원짜리 요구르트도 안팔리는데 뭘 사가겠나. 매출도, 손님도 작년 설의 딱 절반 수준이다."
"제사 지내는 집도 많이 없어져 차례상에 올릴 문어를 사러 오는 손님들도 확 줄었다."
연중 최대 대목 중 하나인 설명절 대목이 빙하처럼 얼어붙었다. 장기화한 고물가, 어수선한 탄핵정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등 겹겹의 악재가 설 대목을 삼켜버렸다. 명절 대목을 기대했던 상인들은 울상이다. 설을 앞둔 시장엔 활기도, 덕담도 사라졌다.
지난 22일 오후 찾아간 서울 송파구 가락동 가락시장에서 만난 상인들의 얼굴에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작년 말 벌어진 12·3 비상계엄 사태 직후 손님이 급감하기 시작했다고 이곳 상인들은 입을 모았다.
생선가게 사장 민경준 씨(70대, 남)는 "명절을 앞두고 손님이 이 정도로 없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비상계엄 이후 손님이 본격적으로 줄기 시작했고 제주항공 참사까지 나면서 소비심리가 빙하처럼 얼어붙었다"고 말했다.
가락시장 수산물 코너엔 종업원이 방문객보다 많았다. 군데군데 문을 열지 않은 가게도 보였다. 크게 뛴 휘발유 가격도 가락시장 상인들을 위축시키는 요인이다. 장사도 안 되는데, 휘발유 가격까지 올라 도매 물건 가지러 오기가 겁이 난다는 게 소매상들의 하소연이다.여느 명절 때와 달리 한산한 '설 성수기 출하차량 대기소'가 이 같은 상황을 설명해준다. 대기소는 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가 설 명절에 대비해 마련한 공간으로, 도매상들의 차량이 주정차 할 수 있는 곳이다.
채소가게를 하는 이미숙 씨(70대, 여성)는 "명절 앞둔 새벽엔 도매를 가져가려는 트럭들로 북적이는데, 실제론 주차공간이 많이 남는다"며 "도매상들이 물건을 사가도 소비가 안 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냐"고 말했다. 서울 주유소의 휘발유 평균 판매가는 최근 1800원대에 진입한 상태다.
뜸한 손님에 시장 포장마차에선 막걸리가 사라졌다. 시장 내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최숙희 씨(가명·60대, 여성)는 "계엄사태 이후 손님이 확 줄어 이달 초부터는 막걸리는 아예 취급하지 못하고 있다. 막걸리는 제때 유통되지 않으면 상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손님이 없는 시기에는 취급하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주택가가 밀집된 서울 양천구 '목동 깨비시장'에서도 설 명절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손님도, 매출도 반토막 났다고 이곳 상인들은 말했다.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김강래 씨(47, 남성)는 "지금 시장은 활기도 없고, 명절에 손님하고 상인하고 주고받던 덕담도 사라졌다"면서 "나라가 어수선해서 더 그런 것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 명절 음식 찾는 사람들이 작년 설보다 절반 정도로 줄었다"며 "설 일주일쯤 전엔 명절 음식 준비하려는 사람들로 북적북적이는게 정상인데, 지금은 정육점이고, 전집이고 한산하다"고 말했다.
떡, 만두 장사를 하는 윤명자 씨(가명·60대, 여성)도 "지금쯤 떡국떡은 없어서 못파는 게 일반적인데, 남아돈다"면서 "나라가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워 명절 기분이 안 난다"고 하소연을 했다.
나물과 채소를 파는 김순정 씨(가명·70대, 여성)도 "지금쯤이면 고사리, 시금치 등 제삿상에 올릴 것들을 미리 사가곤 하는데 올해는 한산하다"면서 "살림살이가 더 팍팍해진 것 같다"고 했다. 옷가게를 하는 정경숙 씨(가명·70대, 여성)도 "작년 추석에도 안 좋았는데, 올해 설엔 더 심각하다"고 울상을 지었다.
지난 19일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만난 상인도 "옛날에는 차례상에 올릴 생선이나 문어 등을 사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지만 요즘엔 제사 지내는 집도 많이 없어져 명절 장을 보러 오는 손님도 줄었다"고 했다. 그나마 손님이 몰리는 곳은 할인 행사가 열리는 점포 뿐이다.
장기화한 고물가에 장바구니를 든 소비자들이 지갑을 쉽게 열지 않고 있다. 한국물가정보에 따르면, 올해 설 차례상 차림비용은 4인 가족 기준 역대 최고치인 40만원을 돌파한 상태다. 서울의 경우 전통시장 기준 22만원, 대형마트 기준 25만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1.0%, 2.5% 상승(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했다.
이처럼 명절 직전까지도 소비가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은 경기불황과 고물가에 계엄사태 이후 이어지고 있는 정국 불안까지 덮친 여파로 해석된다. 이동훈 한국물가정보 팀장은 "어수선한 시국, 제주항공 참사에 따른 애도 등의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작년 연말부터 사람들의 이동이 줄고 왁자지껄한 연말연시 분위기도 나지 않았던 것이 올해 '조용한 설'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쪼그라든 소비심리에 지갑 사정은 더 얇아졌다.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전국 성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 명절 소비인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1.6%가 '작년보다 지출을 줄일 계획'이라고 답했다. '지출을 늘릴 계획'이라는 답변은 22.0%에 그쳤다. '지속되는 고물가'(58.9%)가, '경기 불황 지속'(36.7%), '가계부채 증가'(31.0%) 등이 지출을 줄이는 이유로 꼽혔다.
문제는 탄핵 정국, '트럼프 리스크' 등 불안 요인으로 볼 때, 위축된 소비심리가 단기간에 풀리긴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소비를 할 환경이 안 되는 게 문제"라며 "돈도 없는데 심리적으로도 정국 불안정으로 인해 위축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시장에 돈이 풀려야 소비심리가 살아날텐데, 지금 정국은 이를 지원할 상황이 아니지 않느냐"며 "설상가상 환율이 1400원을 웃돌며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이는 원자재 비용 상승,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로 인해 소비 위축이 장기화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김수연·이상현·박순원기자 newsnew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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