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력까지 추월한 가운데, 일본도 대대적인 정부 지원을 기반으로 반도체 시장에서 부활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은 반도체 관세를 포함해 자국 투자를 유인하면서 현지에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대한 반도체 보조금 지급 여부도 불확실성이 커졌다.
이처럼 인공지능(AI) 시장 확대로 기업을 넘어 국가간 반도체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정치 논리에 휘말려 반도체특별법 통과 여부도 불투명해져 기술·인재 확보를 위한 확실한 대응책 없이는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도체 블랙홀 된 中= 23일 업계에 따르면 중국의 반도체 기술력이 한국을 역전한 배경에는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이 뒷받침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미국의 수출 규제에도 중국이 전략적으로 첨단 반도체 수입량을 늘리면서 기술 개발의 밑거름으로 삼았다는 진단이다. 중국 정부는 올해까지 반도체 산업 지원에 1조위안(약 178조원)을 투자하기로 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일본·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의 중국 매출 비중도 늘고 있다. 무역안보관리원이 최근 발간한 '트레이드 앤 시큐리티' 학술지에 따르면 미 반도체 장비사 KLA과 램리서치의 대중국 매출 비중은 2022년 20% 초반까지 떨어졌지만, 작년엔 40%대로 높아졌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작년 1~11월 중국의 반도체 수입 규모(메모리+비메모리)는 2591억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1.1% 늘었다. 특히 한국의 주력인 메모리 수입액이 852억달러로 7.4% 증가한 가운데, 메모리 중 한국산 제품의 수입액은 411억달러로 전년보다 32.5% 큰 폭 증가했다.
작년 우리나라의 고대역폭메모리(HBM) 중국 수출도 큰 폭으로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중국이 미국의 수출 규제 강화 대응을 위해 미리 선물량을 확보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반도체 패권 노리는 日·美=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경쟁력이 높은 일본도 낸드·메모리 분야의 경쟁력을 키워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키옥시아의 경우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에서 332단 낸드플래시 기술을 공개했다. 이는 SK하이닉스 312단, 삼성 286단보다 고(高)적층으로, 작년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2조원 규모의 보조금이 힘을 실었다는 평이다.
일본은 TSMC 공장 유치, 라피더스 설립 등 소부장 분야를 기반으로 반도체 부활을 노리고 있다. 라피더스는 2022년 도요타, 소니, 소프트뱅크 등 8개사가 출자해 설립했으며 일본 정부는 이를 포함해 2030년까지 반도체와 AI에 10조엔(약 96조원)을 투입하겠다는 전략을 발표했다.
이외에 중국 양쯔메모리도 지난달 294단 3D 낸드플래시 메모리 양산을 시작했다. 미 마이크론과 웨스턴디지털도 고적층 기술 고도화 진행 중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에도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포석이 담겨 있다. 중국에 대한 견제는 물론, 반도체에도 관세를 붙여 자국 투자를 유인하겠다는 포석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법에 따라 미국서 보조금을 받기로 했지만 이마저도 불확실성이 커졌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 연방의회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반도체법 보조금을 받기로 미국 정부와 확정한 계약을 이행(honor)하겠냐는 질문에는 "말할 수 없다. 내가 읽지 않은 무엇을 이행할 수 없다"고 답했다.
◇반도체법 제자리 韓… 투자·인재 확보 시급= 이처럼 첨단 반도체 기술 경쟁을 놓고 글로벌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한국만 정치 논리에 휘말려 경쟁력을 잃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가반도체산업진흥센터 신설과 고용보조금 지원 등을 골자로 한 반도체 특별법의 경우 주 52시간제 예외를 놓고 여야간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면서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국가별 기업의 매출 대비 반도체 R&D 투자 비율은 2022년 기준 미국 19.5%, 유럽 14.0%, 일본 12.0%, 대만 11.0%인 데 반해 한국은 9.5%에 그친다.
신동평 KISTEP 기술예측센터 센터장은 "반도체 시장은 다시금 부흥을 꿈꾸는 일본, 중국의 급격한 부상,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강력한 제재와 싱가포르·베트남·말레이시아 등을 주축으로 한 동남아시아의 급성장 등으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며 "한국은 정부의 R&D 투자 절대 규모도 작지만 민간 기업의 매출 대비 R&D 투자비용도 적다. 시스템 반도체 분야로의 전환도 더딘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설계·파운드리 역량 확보, 설계-제조-후공정간 연계성 강화, 소부장 육성, 공공 인프라 마련 등 시스템 반도체 산업 기반 강화를 위한 종합 전략이 필요하다"며 "인재 확보와 기존 핵심 인재의 유출 방지, 정부의 반도체 인력양성 정책과 함께 인센티브, 해외 전문 인력 유치를 위한 이민정책 등 인재 유치를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