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루의 저주(Skyscraper Curse).' 이 용어는 지난 1999년 독일 도이체방크의 분석가였던 앤드루 로런스가 내놓은 경험적 가설의 하나로, '초고층 빌딩 건설 열풍이 해당 기업이나 국가의 대규모 경제 위기를 예고 내지 초래했다'는 말이다.
로런스는 100년간 사례 분석을 통해 대체로 호황기에 초고층 건물을 건설하기 시작하지만 막대한 건설 비용이 들어가 기업의 부채가 늘어나거나 완공 시기에 경기 과열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불황기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30년대 미국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381m) 이 완공할 무렵 대공황이 시작됐고, 이후 1970년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각 415, 417m)와 시카고 윌리스타워(442m)가 세워진 후에 오일 쇼크 사태가 벌어진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3일 업계에 따르면 초고층 빌딩을 지은 기업에는 불행한 일이 생긴다는 '마천루의 저주' 속설이 최근 다시 입길에 올랐다. 높이 555m의 세계 6위, 국내 1위의 초고층 빌딩 롯데월드타워(사진)를 지은 롯데그룹과 국내 대표 금융중심지 서울 여의도 랜드마크 '63빌딩'을 지은 신동아건설이 모두 어려움에 처했기 때문이다.
2017년 4월 문을 연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는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의 창업주이자 명예회장의 숙원 사업으로, 건설 과정에서 약 4조원 이상의 비용이 투입됐다. 건설 비용뿐만 아니라 땅값, 세금, 외부 공사, 기부채납 등까지 모두 포함된 금액이다.
준공한지 8년 만인 지난해 롯데그룹은 신용위기에 처한 롯데케미칼을 위해 롯데월드타워를 은행권에 담보로 내놓았다. 그룹은 새해 들어서도 유형자산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유동성을 확대하고 있다. 그렇게 지난 석 달여 만에 처분한 자산만 5개다.
작년 12월 렌터카 업체인 롯데렌탈을 매각하고 사업성이 낮다고 판단한 헬스케어 사업을 청산했다. 지난달 롯데웰푸드 제빵사업부 증평공장을 신라명과에 매각했고, 세븐일레븐 편의점을 운영하는 코리아세븐은 현금인출기(ATM) 사업부를 매각했다. 롯데케미칼은 파키스탄 자회사 LCPL의 보유지분 전량(75.01%)을 파키스탄계 사모펀드 투자회사 등에 979억원에 매각했다. 미수령 배당금 등을 합해 1275억원을 확보할 예정이다.
비상장사인 롯데건설도 서울 서초구 잠원동 본사 부지 매각(5000억원대 추정)을 포함한 1조원 규모 자산을 유동화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우발 채무를 개선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 회사의 작년 말 PF 우발 채무는 약 3조7000억원이다.
토지를 많이 보유한 롯데쇼핑과 호텔롯데는 자산재평가를 통해 각각 자산이 8조7000억원, 8조3000억원이 늘어나 총 12조6000억원의 자본을 확충했다. 이로써 롯데쇼핑의 부채비율은 190%에서 129%로, 호텔롯데의 부채비율은 165%에서 115%로 낮아졌다.
작년 말 기준 롯데그룹의 총자산은 183조원으로, 그룹 측은 지난해 매출액도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한 만큼 유동성에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새해 초 국내 중견 건설사 신동아건설은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국내 최고층 랜드마크였던 63빌딩을 지어 이름을 알린 건설사가 고작 60억원짜리 어음을 갚지 못한 것이다. 63빌딩은 1985년 5월 높이 249ｍ, 지상 60층, 지하 3층 규모로 준공됐다. 당시 빌딩 소유주는 신동아그룹 계열사 대한생명으로, 1999년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됐다. 이후 그룹은 1999년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의 구속 이후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이후 한화가 2002년 대한생명과 63빌딩을 인수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신동아건설은 63빌딩을 준공 이후 1989년 신동아그룹에서 사실상 계열 분리했다. 지난 2010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완전 자본 잠식 상태에 빠졌던 신동아건설은 구조조정 끝에 2019년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이후 아파트 브랜드 '파밀리에'를 선보이며 정상화하는 듯 했지만 부동산 호황기였던 2022년 무리한 투자를 벌인 바람에 사정은 급격히 악화하기 시작했다.
지난 1989년 힐튼으로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 윌셔그랜드호텔을 인수한 대한항공은 2017년 이 부지에 미국 서부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윌셔그랜드센터(333.53m)를 지었다. 당초 한진그룹은 서울 경복궁 옆 종로구 송현동 부지 3만6642㎡에 복합문화시설과 7성급 한옥 호텔을 함께 지으려던 계획이 서울시 규제와 여론 때문에 불발되자 야심차게 호텔복합시설 윌셔그랜드센터 착공에 나섰다.
건설 비용만 10억달러(당시 약 1조1400억원)이 넘는 윌셔그랜드센터는 준공 이후 그룹 내에서는 '돈 잡아먹는 하마'로 불리는 적자 자산이다. 대한항공은 이 건물을 소유한 미국 자회사 한진인터내셔널의 주주배정 유상증자에 참여하는 등 2023년 9507억원, 2024년 6월 추가로 5500억원 등의 적자를 대신 메워주고 있는 중이다.
고 성완종 회장이 이끌던 경남기업이 법정관리까지 간 것은 베트남 초고층빌딩 랜드마크72의 건설 이후다. 아랍에미리트(UAE)의 828ｍ 초고층 빌딩인 부르즈칼리파를 지은 국영기업 두바이월드는 완공을 2개월 앞둔 2009년 11월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기도 했다.
서울시가 마포구 상암동에 짓는 690m, 133층의 높이의 랜드마크 빌딩도 23년째 표류중이다. 수차례의 입찰 공고에도 사업자가 나타나지 않자 서울시는 새 사업을 위한 연구 용역을 발주할 계획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전 부지에 그룹 사옥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현대차그룹도 105층 높이의 초고층 마천루를 짓겠다는 초기 계획을 포기하고 지난 2월 50층 높이의 쌍둥이 건물 2개로 짓겠다고 밝혔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공사비 상승 등으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100층 이상 초고층 빌딩을 짓는 것이 실리가 크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 설계안 전면 재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윤희기자 stels@d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