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 문화평론가
![[하재근의 족집게로 문화집기] 올 아카데미상이 주는 메시지](http://contents.dt.co.kr/images/202503/2025030502102269058001[1].jpg "[하재근의 족집게로 문화집기] 올 아카데미상이 주는 메시지")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대놓고 트럼프를 조롱한 발언자는 없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트럼프가 주도하는 최근 흐름과 반대되는 방향이었다. 일단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편집상 등 무려 5개 부문을 수상하며 대이변을 일으킨 '아노라'부터 그렇다.
이 작품은 주류 상업영화가 아닌 저예산 독립영화다. 뉴욕의 스트리퍼 여성이 러시아 재벌 2세와 결혼하자, 러시아 재벌이 훼방을 놓는다는 블랙 코미디다. 백인 남성이 아닌 사회 하층 여성을 조명한 것이다. 이 작품을 만든 숀 베이커 감독은 성산업 관련자, 불법체류자, 홈리스 등 미국의 억압받는 소수자들의 삶을 조명해왔다. 시상 결정은 개별 작품만으로도 이루어지지만, 과거부터 누적된 경력을 중요하게 반영할 때도 많다. 소수자를 조명해온 베이커 감독의 경력도 이번 시상에 크게 작용한 걸로 보인다.
이번에 사회를 맡은 코넌 오브라이언은 '아노라'를 소개하며 "미국인들이 강한 러시아인에게 맞서는 장면을 보게 돼 신난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러시아 재벌과 스트리퍼 여주인공이 맞서는 구도이기 때문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압박하며 러시아 편을 드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자 헐리우드가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번 시상식의 주인공이 될 것이 유력했던 '에밀리아 페레즈'는 여우조연상, 주제가상 등 단 두 부문만을 수상했다. 무려 13개 부문에 후보로 지명되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작품임에도 철저히 외면당한 것이다. 시상식 현장에선 이 작품의 여주인공이며 이미 칸영화제에서 이 작품으로 여우주연상도 받은 바 있는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을 사회자가 대놓고 조롱하기도 했다.
원래는 여우주연상 1순위로 거론된 작품이었다. 가스콘이 여성으로 성전환한 멕시코 마약조직 두목으로 나온다. 남성성 강한 폭력조직 속 성소수자를 조명했기 때문에 최근의 다양성 흐름 속에서 수상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가스콘이 과거 SNS에 소수자 혐오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분위기가 반전됐다.
윤여정과 흑인 배우 등이 조연상을 받은 2021년에 "내가 아프리카-한국 축제나 흑인 인권 시위, 3·8 여성대회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썼다는 것이다. 2020년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때도 그를 폄하하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진 직후 '에밀리아 페레즈'는 모든 부문의 유력 수상 후보에서 제외됐고, 여우주연상이 확실시됐던 가스콘은 시상식 참석조차 힘든 처지로 전락했다. 막판에 시상식엔 참석하는 것으로 정리됐지만 상은 주어지지 않았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자가 대놓고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외면 받는 가운데에도 '에밀리아 페레즈'가 여우조연상은 수상했는데, 그 상을 받은 조이 살다나는 흑인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다며 "스페인어로 노래하고 연기해 상을 받은 내 모습을 할머니가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도 트럼프의 백인 중심, 반이민 정책과 상반되는 광경이다.
남우주연상은 '브루탈리스트'의 에이드리언 브로디에게 돌아갔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를 연기했다. 이스라엘에 밀착하는 트럼프와 달리 미국 연예계에선 최근 반 이스라엘 흐름이 나타났기 때문에 유대인 역할 수상은 의외다. 홀로코스트 이슈에 여전히 강력한 호소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동시에 이민자의 이야기도 다뤘다. 브로디는 수상소감에서 "전쟁과 체계적인 억압이 트라우마,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을 남겼다"며 "건강하고 포용적인 세상을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올해 최고 이변으로 꼽힌 결과는 장편 다큐멘터리 '노 아더 랜드'의 수상이다.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고발한 작품으로 최근 미 연예계의 반 이스라엘 정서를 표현했다.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 공연 때는 태국인 케이팝 가수인 리사가 무대에 올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이민자, 소수자, 약자 등을 조명하며 트럼프와 다른 메시지를 전한 아카데미 시상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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