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네트워크법(DNA)은 단순한 규제 개혁이 아니라 통신 산업 경쟁력을 높이고 빅테크와 공정한 협력 구조를 마련할 핵심 법안이다."
알레산드로 그로펠리(Alessandro gropelli) 커넥트유럽(구 ETNO) 사무총장은 지난 5일(현지시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2025'에서 본보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이같이 밝혔다. 디지털 정책을 둘러싼 미국과의 갈등 가능성에 대해서는 디지털네트워크법은 특정 국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커넥트유럽은 40여개 유럽통신사와 제조사를 회원으로 구성된 유럽 대표 유럽통신사업자협회다. 지난해 9월 ETNO에서 커넥트유럽으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집행 이사회에서 그로펠리가 신임 사무총장으로 추천됐다.
전세계 통신업계에서 글로벌 빅테크가 유발하는 인터넷 트래픽이 늘어나면서 망 비용 분담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네트워크 비용 공정분담을 골자로 하는 EU 집행위원회의 디지털네트워크법 추진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AI 시대를 맞아 통신 트래픽이 급증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국내에서도 법제화를 통해 글로벌 빅테크와 협상력을 갖춰야 한다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이 법안에는 사업자간 망 이용대가 협상이 어려운 경우를 대비해 분쟁 해결 메커니즘을 도입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로펠리 사무총장은 "디지털네트워크법은 기존의 낡은 구리선 기반 네트워크 규제를 벗어나 유비쿼터스 연결성과 몰입형 경험에 적합한 새 규제 체계를 구축하는 핵심 법안이 될 것"이라며 "통신사에게만 과도하게 부과된 규제를 완화하고 빅테크 기업과 동등한 규제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망 이용대가'와 같은 인프라 비용 분담에 대해 공정한 협상 환경을 갖춰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망 이용대가 문제는 기존의 인터넷 구조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상업적 협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제 3자가 개입하는 중재(arbitration) 시스템이 도입될 경우 협상 과정이 신속하고 투명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디지털네트워크법에 분쟁 해결 메커니즘이 포함될지 여부는 연말까지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중재 역할을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제3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재 기관으로는 통신 규제 기관, 유럽위원회나 제 3의 기관이 지목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협상이 실패할 경우 중재 시스템을 통해 공정하면서도 더 빠른 협상을 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미·중 갈등 심화 속 EU가 독립적인 통신·디지털 정책을 추진하면서 기술 주권 강화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갈등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불거지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EU를 상대로 자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보호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번 MWC에서 브랜든 카 미국 통신연방위원회(FCC) 위원장은 유럽의 디지털서비스법(DSA)을 겨냥해 자국 빅테크를 보호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로펠리 사무총장은 "디지털네트워크법은 특정 기업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통신사와 빅테크간 협상 구조를 투명하고 공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며 "망 이용대가 논의는 상업적 합의의 영역이며, 이는 인터넷의 근본적인 운영 방식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그는 "유럽이 추진하는 통신 정책과 미국의 전략적 목표 사이에 본질적인 충돌이 존재한다고 보지는 않는다"며 "양측 모두 안정적이고 안전한 네트워크를 전략적 이익으로 간주하며, 공정한 상업적 협상이 이뤄진다면 갈등 요소는 크지 않을 것"이라며 디지털네트워크법이 미국과의 갈등 요소가 될 것이라는 우려에 선을 그었다.
AI 패권 경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것도 EU의 최대 과제다. 그로펠리 사무총장은 AI 트래픽 증가가 통신업계의 중요한 이슈로 부상하는 가운데 유럽 통신사들은 이를 위기이자 기회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AI는 네트워크 운영을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 핵심 기술이며, 유럽 통신사들에게도 새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AI 트래픽이 폭증하면서 데이터센터 간 연결과 엣지 컴퓨팅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통신사들이 단순한 네트워크 제공업체를 넘어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 제공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짚었다.
특히 5G와 네트워크 가상화 기술을 활용해 AI 트래픽을 최적화하고, 데이터 트래픽을 수익화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 과제라고 봤다. 그는 "향후 몇 년간 AI 관련 데이터센터 트래픽이 5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통신사들이 이 증가하는 트래픽을 수익화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한국 통신사들의 AI 활용 사례에도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커넥트유럽은 32년 만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의 새 임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맞춰 ETNO에서 조직명을 변경했다. 그로펠리 사무총장은 "유럽과 유럽인들을 연결(Connect)하는 역할을 강조해 통신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조직의 방향성과 목표를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바르셀로나(스페인)/글·사진=
김나인기자 silkni@dt.co.kr
알레산드로 그로펠리(Alessandro gropelli) 커넥트유럽(구 ETNO) 사무총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나인 기자
알레산드로 그로펠리(오른쪽) 커넥트유럽 사무총장과 하울로 그라시아(Paolo Grassia) 정책 및 대외협력 담당 선임 이사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나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