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헌법재판소는 계엄을 선포할 만큼 국가가 위기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군대를 동원한 데서 단순히 경고성이라는 주장을 기각했으며,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보았다.
만장일치의 결과였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고통의 5년'을 보내본 적이 있는 정치권은 이전과 다르게 움직였다. 박근혜 탄핵 정국에선 '샤이 보수'가 키워드였다면, 윤석열 탄핵 정국에선 오히려 여론전에 적극적이었다. 태극기 집회에도 눈 하나 깜짝 않던 민주당도, 이번에는 탄핵이 기각·각하되는 것은 아닌가 불안감을 가질 정도였다.
기세는 좋았지만 정작 여권에서 주장한 내용 중 받아들여질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헌재가 거의 유일하게 받아들인 부분은 '윤 전 대통령이 야당의 전횡으로 국정이 마비되고 국익이 현저히 저해돼 간다고 인식했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 그리고 이를 어떻게든 타개해야만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점' 정도였다. 이른바 '계몽령' 주장이나 탄핵심판 과정에서 내란죄를 삭제했기 때문에 각하시켜야 한다는 주장, 계엄은 대통령의 권한이라는 주장 등은 정면으로 반박됐다. 그나마 탄핵 심판 과정에서 치열하게 다퉜던 홍장원 국가정보원 1차장의 메모 등은 아예 언급되지도 않았다.
이는 보수세력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유권자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국민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을 듣고 싶어 했을 것이다. 첫째, 이번 계엄 선포가 과연 누가 대통령이었더라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는가. 둘째, 국가 비상사태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대통령이 꺼내 들어야 할 최후의 수단인 계엄령이 실제로 그만큼의 정당성을 갖추고 있었는가. 셋째, 공권력이 정당한 질서 유지 수단이 아니라 특정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 오용된 것은 아닌가.
하지만 보수세력은 윤 전 대통령의 직무 복귀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법리논쟁에 매몰됐다. 결국 유권자들에겐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은 셈이 됐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엔 명쾌하지 않은 주장을 하면서 행동만 거칠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이 없는 중도층이 싸늘하게 반응한 것도 당연했다. 정치 고관여층이 개입된 여론조사와 4·2 재보궐선거 결과가 판이한 것도 놀랍지 않다. 모두 자업자득이고, 보수세력이 무능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지금의 보수는 무능했던 과거사를 청산할 수 있는 한 번의 기회를 얻었다. 국민 모두가 보수가 위기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대중적인 반감이 여전히 적지 않다는 것도 여론조사나 호남에서의 보궐 선거 결과로 확인된다. 190석 의회권력을 가진 이 대표에게 대통령 권력까지 몰아주는 결정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주장도 공감대를 얻고 있다. 보수세력이 하나로 똘똘 뭉쳐 양강구도를 만들 수만 있다면, 지난 대선처럼 초박빙 승부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단 이야기다.
다만 과연 보수가 그런 '정치력'을 보유했는지 의문이 든다. 흔히들 정치를 '갈등을 중재하고, 대화와 타협을 이끄는 예술'로 표현하곤 하는데, 현재 여권에서 그런 힘을 본 지 너무 오래됐다. 한 줌 유튜버에게 의제를 빼앗기며 끌려다녔고, 부정선거 음모론에 경도됐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도 '배신자'나 '내 편' 찾기에만 정신 팔린 모습을 보여줬다. 수권정당을 꿈꿀 자격이 없는 행태였다.
지금은 낙담할 때가 아닌 증명을 할 때다. 내부에서부터 갈등을 봉합하고 대의를 위해 양보하는 품격있는 행동과, 위기 극복 해법을 제시하고 새로운 미래의 아젠다를 세우는 명쾌함을 보여줄 수 있다면, 결과는 바뀔 수 있다. 정치인부터 지지층까지, 진영 전체가 시험대에 올랐다.임재섭기자 yjs@dt.co.kr
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주변에 경찰 펜스가 놓여 있는 사진. 여기에는 윤석열 전 대통령 응원 화환이 늘어서 있었으나, 이날 새벽 종로구청이 모두 수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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