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경기에 정부와 통화당국이 모두 조급해졌다. 탄핵과 조기 대선 정국으로 인한 정치적 불확실성에 경제 심리는 살아나지 않고 있다. 여기에 미국발 관세 폭탄이 4월부터 우리 수출에 본격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급기야 한국은행은 17일 관례를 깨고 선제적으로 경고음을 날렸다. 1분기 우리 경제가 역성장 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공식화한 것이다. 그만큼 현 상황이 엄중하고, 앞날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갑자기 어두운 터널로 확 들어온 느낌"이라고 털어놨다.
◇심각한 경기 상황= 한은은 이날 '올해 1분기 및 향후 성장 흐름 평가'란 보고서를 통해 "1분기 성장률(직전분기 대비)은 2월 전망치인 0.2%를 밑돌 것으로 추정된다. 소폭의 마이너스(-) 성장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한은이 수정 경제 전망 발표(5월)를 앞두고 미리 분기 성장률 중간 집계 상황을 공개한 것은 이례적이다. 시장의 충격을 줄이고 다음 달 기준금리 인하 명분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한은이 당장 '발등의 불'로 떨어진 경기 침체에 대해 경고음을 울린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한은은 성장 부진의 배경으로 국내 정치 불확실성 장기화와 미국 관세정책 우려로 3월 중 경제 심리 위축 확대, 역대 최대 산불 피해, 일부 건설 현장의 공사 중단, 고대역폭 반도체(HBM) 수요 이연 등을 거론했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역시 통화정책방향 의결문에서 "앞으로 내수 부진이 일부 완화되겠지만 수출은 통상 여건의 불확실성이 지속돼 둔화 흐름을 이어갈 것"이라며 "이에 따라 올해 성장률은 2월 전망치(1.5%)를 하회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정부의 상황 인식도 다르지 않다. 정인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날 "2분기 수출부터 실질적으로 미 관세 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한국의 작년 수출은 역대 최대인 6838억달러를 기록했지만 올해 들어 1분기 수출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2.1% 감소했다. 올해 1분기 대미 수출은 반도체·컴퓨터 분야 호실적에도 자동차·일반기계가 줄어 전체적으로 2.0%, 감소했다. 같은 기간 대중국 수출도 반도체 수출 감소의 영향으로 6.7% 감소했다.
◇덫에 걸린 경기 방어책= 대책은 마땅치 않다. 경기 방어의 양대 축은 '재정'과 '통화'정책이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나랏돈을 풀고, 금리를 낮춰야 하지만 모두 녹록지 않다.
정부는 지난 15일 12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정도 추경 규모로는 이미 침체의 늪에 빠져든 경기를 일으켜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12조 추경'은 당초 계획보다 2조원가량 늘어난 수준이다. 35조원 규모의 대규모 추경 편성을 요구해 온 더불어민주당은 물론 국민의힘 내에서도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12조원 규모의 재정 투입은 미흡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추경 12조원 편성안이 신속하게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한은은 추경이 12조원 규모로 집행되면 0.1%포인트(p) 정도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 총재는 한은이 정부지출승수를 0.4~0.5 정도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지출을 1원 늘리면 국내총생산(GDP)이 0.4~0.5원 늘어나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지난 2월 이 총재는 15조~20조원의 추경이 적절하다며 이럴 경우 올해 경제성장률이 0.2%p(1.5→1.7%) 높아질 것이라 전망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가 추경을 12조원으로 편성한 만큼, 이대로 국회를 통과한다면 경제성장률 상승 폭은 기대치보다 낮아질 수 있다.
한은이 주도하는 통화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한은은 경기 침체에도 이달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경기 방어를 위해서는 금리 인하가 시급하지만 고환율이 걸림돌이다.
올들어 미국 달러화 가치는 8% 넘게 급락했다. 40년만의 최대 하락 폭이다. 유로화 등 주요 6개 통화에 대한 달러화 가치를 반영하는 달러인덱스는 16일(현지시간) 전장 대비 0.77% 내린 99.38을 나타냈다. 이는 2022년 4월 이후 최저치다. 앞서 11일 달러인덱스는 2023년 7월 이후 처음으로 100 이하로 주저앉았다. 그러나 원·달러 환율은 여전히 1400원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총재는 "경기 상황과 물가를 봤을 때 금리 인하가 필요하지만 여러 정책 불확실성과 금융 안정, 자본유출입을 함께 고려할 때 당분간 금리를 동결하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실화하는 '0%대' 성장률 악몽= 한은은 다음 달 29일 수정 경제전망을 통해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5%에서 하향 조정할 것으로 전망된다. 2월 전망 당시 한은이 비관적 관세전쟁 시나리오에서 올해 성장률을 1.4%로 봤고 한은 스스로 "실제 미국 관세정책이 예상보다 더 세다"고 평가한 만큼 대규모 추가경정예산 집행이나 관세 협상 타결 등이 없는 한 5월 전망치는 1.4%마저 밑돌아 1% 안팎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이 총재도 "올해 연간 성장률은 1분기 성장 부진을 감안할 때 지난 2월 전망치 1.5%를 하회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도 보고서를 통해 "1분기 경기 부진에 최근 미국의 강도 높은 관세 조치까지 가세해 2월 전망 당시와 비교해 국내 성장의 하방 리스크(위험)가 상당폭 확대됐다"고 진단했다.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에 대한 국내외 전망 기관의 예상치 역시 어둡다. 지난 10일 기준 주요 40여개 투자은행(IB) 등 시장 참가자들의 전망치 중윗값은 1.4%, 하위 25% 값은 1.1%다.
글로벌 투자은행(IB) 사이에선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이 1% 안팎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JP모건이 최근 0.9%에서 0.7%로 낮췄고 씨티와 노무라도 1%대 턱걸이 수준인 1.2%를 제시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도 한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을 기존 1.8%에서 1.0%로 낮췄다.
주형연기자 jhy@dt.co.kr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7일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질의응답에 응하고 있다. [한국은행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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