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호밍(여러 개의 플랫폼 동시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방송의 콘텐츠 독점시대가 끝났지만, 케이블TV 업계는 여전히 독점을 기준으로 콘텐츠 대가를 지불해야 해 소비자 이용료 상승 등의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때문에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시청 데이터, 콘텐츠 가치, 시장 상황 등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공정·투명한 콘텐츠 대가 산정이 가능하도록 하는 등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정훈 K-엔터테크허브 대표는 24일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주최로 열린 미디어 스터디에서 '멀티호밍시대, 케이블TV 경쟁력 강화와 시청자 보호 위한 정부 지원 확대'를 주제로 발제하며 이같이 주장했다.
한 대표는 먼저 해외 주요국들이 멀티호밍 시대에서 시청자 보호와 시장 경쟁의 균형을 맞추는 정책적 대응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점을 소개했다. 유럽연합(EU)은 디지털시장법(DMA)을 통해 플랫폼 간 전환 장벽을 제거하고 데이터 이동성을 보장함으로써 멀티호밍을 촉진하고 있으며, 독일은 멀티호밍을 제한하는 배타적 계약과 독점 행위를 경쟁 제한 행위로 규정하고 사전 규제 체계를 운영 중이다. 미국과 영국 역시 시청자가 원하는 채널만 선택할 수 있는 '알라카르테 요금제'를 권고하고 독점적 콘텐츠 계약을 금지하는 등 시청자 권익 보호와 플랫폼 간 공정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반면 국내 케이블TV 업계는 △콘텐츠 확보 비용 △재전송료 부담 △광고 수익 감소라는 삼중의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게 한 대표의 진단이다. 특히 콘텐츠 사용료 체계는 여전히 단일 플랫폼 유통 환경을 전제로 설계돼 있어 멀티호밍이라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한 대표는 "동일 콘텐츠가 여러 플랫폼에 공급되는 상황에서도 각 플랫폼이 각각 대가를 부담해야 하는 구조는 과도한 비용 부담을 초래하며 이는 시청자 요금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짚엇다.
케이블TV의 주요 수익원인 광고시장 또한 변화하고 있다. 콘텐츠의 중복 소비가 일반화되면서 광고주는 노출 효율 저하를 우려해 광고 단가를 낮추고 플랫폼의 수익성은 약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콘텐츠 대가와 광고 수익 간 괴리가 커지고 있으며 이중 부담 구조 속에서 유료방송 플랫폼의 지속 가능성은 점차 위협받고 있다.
이 같은 환경 변화에 맞춰 콘텐츠 대가산정 체계를 재설계 해야 한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멀티호밍 구조에서는 기존처럼 독점 가치를 기준으로 콘텐츠 대가를 일률적으로 산정하는 방식이 더 이상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콘텐츠의 독점 소비분에만 적정 대가를 매기고 중복 소비에 대해서는 낮은 단가를 적용하는 '인크리멘털 프라이싱'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2023년 미국 디즈니와 차터 커뮤니케이션즈 간 협상 사례에서도 이 원칙이 반영됐다. 차터는 디즈니 콘텐츠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등 다양한 경로로 유통되고 있음을 이유로 기존 송출료가 부당하다고 주장했고 디즈니는 일부 콘텐츠를 별도 비용 없이 제공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마무리했다. 한 대표는 "이 사례는 멀티호밍 환경에서 콘텐츠의 독점 가치가 실질적으로 낮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한 대표는 국내에서도 콘텐츠 소비 데이터(시청률, 광고 수익, 선호도 등)를 기반으로 한 AI 분석 시스템을 도입해 콘텐츠 대가를 합리적으로 산정하고 정부는 이를 제도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 대표는 "이러한 체계는 플랫폼의 부담을 줄이고 시청자 요금 인상 위험을 완화하며 미디어 시장의 공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기반이 될 것"이라며 "또한 콘텐츠 사용료의 급등을 방지하는 인상률 상한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연간 인상폭을 소비자물가지수(CPI)에 일정 비율을 더한 수준으로 제한하거나, 갈등 발생 시 신속한 중재가 가능한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협상 결렬에 따른 블랙아웃(방송 송출 중단) 사태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김미경기자 the13ook@dt.co.kr
24일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주최로 열린 미디어 스터디에서 한정훈 K-엔터테크허브 대표가 '멀티호밍시대, 케이블TV 경쟁력 강화와 시청자 보호 위한 정부 지원 확대'를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김미경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