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공사 분리 '전화 대중화' 이뤄 공직 이후 학계서 인재양성 주력"
"정부ㆍ기업 공동 TDX프로젝트 세계 첫 CDMA 상용화 초석"
"정부ㆍ기업 공동 TDX프로젝트 세계 첫 CDMA 상용화 초석"
■ 특별인터뷰 - 오명 전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장관
대담=오창규 편집국장
정보통신 강국이 될 것인가. 경공업과 중화학 공업 중심국가로 나아갈 것인가. 오명 전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의 1980년 당시 결단과 추진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지금과 같은 IT강국 대열에 올라 설 수 있었을까.
1970∼80년대는 정부가 모든 것을 이끌어 나갔던 시절로 정책을 끌고가는 리더들의 능력과 혜안이 그만큼 중요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오명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은 1980년 청와대 비서관을 시작으로 처음 공직에 입문하며 체신부 차관과 장관, 과학기술부 장관과 정보통신부 장관 등을 두루 거치며 전자산업을 뚝심 있게 육성, 오늘날 IT코리아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 전 부총리는 디지털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세계 가전 기업 1, 2위를 바라보는 삼성전자와 LG전자조차도 당시에는 단순 조립만 전담하는 구멍가게 수준일 만큼 우리나라 전자산업 여건은 열악했다"고 회고했다. 국가의 정책 역시 전흔이 채 아물지 않은 채 냉전이 지속되고 있을 때로 산업 정책과 방향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경공업과 중화학 공업 육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오 전 부총리는 `30년 후의 코리아를 꿈꿔라'는 자서전의 제목처럼 전혀 다른 미래의 모습을 그렸다. 한국이 미래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전자 산업에 서둘러 대응해야한다고 내다본 것이다.
1980년 전자 산업 육성을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의 진정성을 알아본 당시 청와대 김재익 경제수석은 40세에 불과하던 오 전 부총리를 청와대 비서관으로 발탁, 파격적인 권한을 주며 컬러TV 방송을 시작으로 전자산업에 대한 본격적으로 나선다.
당시 컬러TV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자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 과감히 컬러 방송과 TV생산을 추진해 오히려 값을 낮추며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당시의 기술로는 엄두도 못 낸다며, 기술 개발 예산조차 제대로 짜지 못했던 전전자교환기(TDX)를 국산화했다. 이 때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반도체와 컴퓨터 산업 발전은 물론, 마침내 이동통신 분야에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 세계최초 상용화까지 이뤄내는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IT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에는 모두 오 전 부총리가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한국의 모든 대통령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두환 전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으로 공직에 처음 입문한 이후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대통령이 차례로 그를 장관으로 영입, `직업이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오 전 부총리는 공직퇴임 이후에는 인재 양성에 본격 눈을 돌리고 건국대 총장직을 맡아, 건국대 외국인 학생수를 취임전 보다 약 20배 늘리는 등 국제화 대학으로 탈바꿈 시켜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KAIST의 이사장에 취임했다.
정보통신 강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낸 오명 전 부총리의 파란만장했던 한국의 통신 역사에 대한 회고와 리더십에 대한 철학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최근 총장직에서 퇴임한 건국대 근처 한 음식점에서 오명 전 부총리를 만났다. 오 전 부총리가 쓰는 휴대폰은 두 대로 아이폰과 갤럭시S다. 오 전 부총리는 "갤럭시S와 아이폰을 둘 다 사용하지만, 아이폰을 좀 더 애용한다. 갤럭시S보다 아이폰에 담을 수 있는 연락처가 훨씬 많다"며 이용자 입장에서 두 제품을 비교하기도 했다.
아무리 과학기술부 장관 출신이라지만, 고희를 바라보는 원로가 스마트폰을 다루는 모습은 "역시 오명!"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오게 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신분의 학자로 미국 뉴욕주립대에 전자공학을 공부하러 간 것이 통신과 IT 발전의 중요성에 대해 눈뜨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1980년대 당시는 전화를 이용하려면 약국을 통해야 했다. 따라서 약국의 주 수입원이 바로 전화. 시외통화는 공중전화로는 불가능했으며, 국제전화 한 번 하려면 광화문 국제전신전화국에 신청 후 1∼2시간 대기 후에야 겨우 이용할 수 있었다. 통신수요도 감당이 되지 않아 10원이면 공중전화가 자동으로 `뚝'하고 끊어지곤 했다. 그래야 다음 사람도 쓸 수 있었기 때문. 오명 전장관은 공중전화 때문에 다투다가 살인이 났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던 상황 속에서 미국 유학길 오른다.
미국은 완전히 달랐다. 비싼 요금에 자주 끊기던 한국의 전화 환경과 달리 콜렉트콜을 비롯해 다양한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학생 신분임에도 전화를 신청하자 곧바로 설치해주는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당시 한국에선 5등급제. 일반국민 5, 교수 4, 정부부처 3등급으로 나눠 전화를 설치, 5등급은 신청해도 1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전화한대 값이 250만원으로 서민주택 1채 값 보다 비쌌던 상황.
"미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한국에서도 전화 대중화가 가능하며, 반드시 이뤄내야다고 결심했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와 체신부 차관으로 재직 시절, 퇴직 직원들이 유일한 생계줄이라며 반대하는 데도 단호히 교환원을 없앴다. 또한 전화기 자급제를 실시 다양한 전화 회사들이 경쟁하며 단가를 낮출 수 있도록 했다.
과감한 개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체신부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통신공사(현 KT)를 체 분리시켰다. 지금이야 KT가 좋은 직장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당시 체신부 직원들 가운데는 KT로 가는 것을 꺼려 체신부에 남게 해달라는 청탁이 자주 들어왔다. 그는 육군 사관학교 선배의 부탁마저 거절하며 전화업무는 KT로, 이외 업무는 체신부라는 원칙을 세워 끝까지 관철시켰다. 오 전 부총리는 "아무런 잡음 없이 성공적으로 통신공사 분리를 마무리한 것이 내 공직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추진력만 강한 것으로 보이는 그의 리더십 밑바탕에는 `겸손함'이 있다. 그는 1981년 41세의 나이로 파격적으로 체신부 차관에 발탁됐을 당시 젊은 패기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들 나이가 많으니 정중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고 떠올렸다. 보고 받는 것도 황송한 상황으로 정중히 대하다보니 상당히 겸손한 차관으로 인정받게 됐다. 오히려 내부 직원들에겐 좋은 사람으로 인식됐다고 기억했다.
이 때 배운 원칙을 그는 공직생활 내내 유지했다. 어디든지 부서의 전통문화를 존중하는 가운데, 스스로 일할 기회를 만들어 줬다. 그의 리더십 원칙은 조직원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숨쉬면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공무원들은 가장 존경하는 공직자 1위로 그를 꼽는다.
공직생활에서 차분한 논리와 설득으로 온화한 성품으로 인정받는 오 전부총리이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전전자교환기(TDX) 개발에 임하는 자세는 비장했다. 1981년 5월은 추석 때 공사업체들에게 체신부가 돈을 못 주던 상황으로, 한국은행으로부터 200억원의 긴급 융자를 받는 등 열악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1년에 교환기 관련 수입 비용만 5000억원으로, 한국 기술의 기술 수준으로는 꿈도 못 꾼다며 체신부 내부 직원들조차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논리를 세워 밀어붙였다.
"나에겐 모험이 아니고 100% 성공한다고 생각한 프로젝트였습니다. R&D는 돈 쓴 만큼 남아있고, 실패해도 제품의 값을 깎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년에 교환기를 5000억원 도입 중인데, 10%만 깎아도 500억을 깎을 수 있는 것으로 충분히 가치 있다라는 논리로 설득했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4년만에 첫 교환기 나오게 된다. 240억을 투입해 TDX1 1만회선 개발에 성공 후 560억원을 추가로 투입해 2만회선 용량의 TDX2 제품을 개발하는 등 우리나라 IT산업 발전을 이끄는 계기가 됐으며, 이후 세계 최초의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CDMA)이동통신 국산화와 상용화로도 이어진다.
오 전 부총리는 "TDX프로젝트의 의미가 개발도상국에서 정부가 어디까지 주도하는 게 좋으냐에 대한 모범답안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당시 경쟁관계에 있던 삼성, 금성, 대우, OPC 등 4대 전자회사들을 정부가 한데 모아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다. 정부 지원은 초기 240억원에서 560억원까지 추가로 투입됐지만 이후 10배 이상 이익을 거뒀다. TDX 프로젝트는 자금을 투입하면 반드시 산출된다는 확실한 R&D 프로젝트로의 개념을 과학자들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에릭슨의 기술이전과 관련한 비화도 소개했다. 교환기를 도입하기 위한 해외 수입 업체를 결정하기 전에 상대 회사에 대해 모두 조사를 하는데, 이 때는 서로 장비를 팔기 위해 기술을 다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한 반도체 회사의 경우 기술을 모두 주겠다고 했는데 이쪽이 준비 안되니 못 받아온 적도 있었다. TDX프로젝트가 한창 진행중일 때 당시 필요하던 교환기에 대해 에릭슨과 협상에 들어갔다. 당시 3~4개 업체들이 장비를 납품하기 위해 경합하던 상황으로 에릭슨에게 핵심기술을 요청했었다.
"에릭슨 회장은 1시간을 고민하더니 결국 사인하더군요." 이후 에릭슨의 기술은 TDX 성공에 큰 밑바탕이 됐다. 이 과정에는 회사를 결정하기 전에 상대 회사에 대해 모두 조사를 하는 치밀함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그는 "현재 아프리카 르완다와 베트남, 캄보디아 등 개발 도상국들이 TDX 개발 프로젝트를 국가주도 표본으로 보고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TDX 개발의 신화는 향후 CDMA 개발 과정에까지 이어졌다. TDX 국산화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통신 핵심기술과 장비는 모두 국내 기술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던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 미국의 벤처기업 수준에 머물러 있던 퀄컴이 지니고 있던 혁신적인 기술인 CDMA를 최초로 실현하고 관련 기술을 국산화, 이동전화 서비스를 저렴하게 공급해 통신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삼성, LG 등 대기업들 역시 당시 모토로라에 한참 밀려 있었지만, CDMA 개발과정에서 터득한 휴대폰 제조 기술을 통해 해외에 수출할 수 있었고, 현재는 수출 효자 상품이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 대기업들끼리 협력하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현재는 경쟁이 워낙 치열해지다보니 각자의 길을 가는 경향이 강하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리=박지성기자 jspark@
사진=김민수기자 ultrartist@
대담=오창규 편집국장
정보통신 강국이 될 것인가. 경공업과 중화학 공업 중심국가로 나아갈 것인가. 오명 전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의 1980년 당시 결단과 추진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지금과 같은 IT강국 대열에 올라 설 수 있었을까.
1970∼80년대는 정부가 모든 것을 이끌어 나갔던 시절로 정책을 끌고가는 리더들의 능력과 혜안이 그만큼 중요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오명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은 1980년 청와대 비서관을 시작으로 처음 공직에 입문하며 체신부 차관과 장관, 과학기술부 장관과 정보통신부 장관 등을 두루 거치며 전자산업을 뚝심 있게 육성, 오늘날 IT코리아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 전 부총리는 디지털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세계 가전 기업 1, 2위를 바라보는 삼성전자와 LG전자조차도 당시에는 단순 조립만 전담하는 구멍가게 수준일 만큼 우리나라 전자산업 여건은 열악했다"고 회고했다. 국가의 정책 역시 전흔이 채 아물지 않은 채 냉전이 지속되고 있을 때로 산업 정책과 방향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경공업과 중화학 공업 육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오 전 부총리는 `30년 후의 코리아를 꿈꿔라'는 자서전의 제목처럼 전혀 다른 미래의 모습을 그렸다. 한국이 미래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전자 산업에 서둘러 대응해야한다고 내다본 것이다.
1980년 전자 산업 육성을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의 진정성을 알아본 당시 청와대 김재익 경제수석은 40세에 불과하던 오 전 부총리를 청와대 비서관으로 발탁, 파격적인 권한을 주며 컬러TV 방송을 시작으로 전자산업에 대한 본격적으로 나선다.
당시 컬러TV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자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 과감히 컬러 방송과 TV생산을 추진해 오히려 값을 낮추며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당시의 기술로는 엄두도 못 낸다며, 기술 개발 예산조차 제대로 짜지 못했던 전전자교환기(TDX)를 국산화했다. 이 때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반도체와 컴퓨터 산업 발전은 물론, 마침내 이동통신 분야에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 세계최초 상용화까지 이뤄내는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IT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에는 모두 오 전 부총리가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한국의 모든 대통령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두환 전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으로 공직에 처음 입문한 이후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대통령이 차례로 그를 장관으로 영입, `직업이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오 전 부총리는 공직퇴임 이후에는 인재 양성에 본격 눈을 돌리고 건국대 총장직을 맡아, 건국대 외국인 학생수를 취임전 보다 약 20배 늘리는 등 국제화 대학으로 탈바꿈 시켜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KAIST의 이사장에 취임했다.
정보통신 강국 대한민국을 만들어 낸 오명 전 부총리의 파란만장했던 한국의 통신 역사에 대한 회고와 리더십에 대한 철학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준다.
최근 총장직에서 퇴임한 건국대 근처 한 음식점에서 오명 전 부총리를 만났다. 오 전 부총리가 쓰는 휴대폰은 두 대로 아이폰과 갤럭시S다. 오 전 부총리는 "갤럭시S와 아이폰을 둘 다 사용하지만, 아이폰을 좀 더 애용한다. 갤럭시S보다 아이폰에 담을 수 있는 연락처가 훨씬 많다"며 이용자 입장에서 두 제품을 비교하기도 했다.
아무리 과학기술부 장관 출신이라지만, 고희를 바라보는 원로가 스마트폰을 다루는 모습은 "역시 오명!"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오게 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신분의 학자로 미국 뉴욕주립대에 전자공학을 공부하러 간 것이 통신과 IT 발전의 중요성에 대해 눈뜨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1980년대 당시는 전화를 이용하려면 약국을 통해야 했다. 따라서 약국의 주 수입원이 바로 전화. 시외통화는 공중전화로는 불가능했으며, 국제전화 한 번 하려면 광화문 국제전신전화국에 신청 후 1∼2시간 대기 후에야 겨우 이용할 수 있었다. 통신수요도 감당이 되지 않아 10원이면 공중전화가 자동으로 `뚝'하고 끊어지곤 했다. 그래야 다음 사람도 쓸 수 있었기 때문. 오명 전장관은 공중전화 때문에 다투다가 살인이 났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던 상황 속에서 미국 유학길 오른다.
미국은 완전히 달랐다. 비싼 요금에 자주 끊기던 한국의 전화 환경과 달리 콜렉트콜을 비롯해 다양한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학생 신분임에도 전화를 신청하자 곧바로 설치해주는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당시 한국에선 5등급제. 일반국민 5, 교수 4, 정부부처 3등급으로 나눠 전화를 설치, 5등급은 신청해도 1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전화한대 값이 250만원으로 서민주택 1채 값 보다 비쌌던 상황.
"미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한국에서도 전화 대중화가 가능하며, 반드시 이뤄내야다고 결심했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와 체신부 차관으로 재직 시절, 퇴직 직원들이 유일한 생계줄이라며 반대하는 데도 단호히 교환원을 없앴다. 또한 전화기 자급제를 실시 다양한 전화 회사들이 경쟁하며 단가를 낮출 수 있도록 했다.
과감한 개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체신부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통신공사(현 KT)를 체 분리시켰다. 지금이야 KT가 좋은 직장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당시 체신부 직원들 가운데는 KT로 가는 것을 꺼려 체신부에 남게 해달라는 청탁이 자주 들어왔다. 그는 육군 사관학교 선배의 부탁마저 거절하며 전화업무는 KT로, 이외 업무는 체신부라는 원칙을 세워 끝까지 관철시켰다. 오 전 부총리는 "아무런 잡음 없이 성공적으로 통신공사 분리를 마무리한 것이 내 공직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추진력만 강한 것으로 보이는 그의 리더십 밑바탕에는 `겸손함'이 있다. 그는 1981년 41세의 나이로 파격적으로 체신부 차관에 발탁됐을 당시 젊은 패기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들 나이가 많으니 정중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고 떠올렸다. 보고 받는 것도 황송한 상황으로 정중히 대하다보니 상당히 겸손한 차관으로 인정받게 됐다. 오히려 내부 직원들에겐 좋은 사람으로 인식됐다고 기억했다.
이 때 배운 원칙을 그는 공직생활 내내 유지했다. 어디든지 부서의 전통문화를 존중하는 가운데, 스스로 일할 기회를 만들어 줬다. 그의 리더십 원칙은 조직원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숨쉬면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다. 공무원들은 가장 존경하는 공직자 1위로 그를 꼽는다.
공직생활에서 차분한 논리와 설득으로 온화한 성품으로 인정받는 오 전부총리이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전전자교환기(TDX) 개발에 임하는 자세는 비장했다. 1981년 5월은 추석 때 공사업체들에게 체신부가 돈을 못 주던 상황으로, 한국은행으로부터 200억원의 긴급 융자를 받는 등 열악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1년에 교환기 관련 수입 비용만 5000억원으로, 한국 기술의 기술 수준으로는 꿈도 못 꾼다며 체신부 내부 직원들조차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논리를 세워 밀어붙였다.
"나에겐 모험이 아니고 100% 성공한다고 생각한 프로젝트였습니다. R&D는 돈 쓴 만큼 남아있고, 실패해도 제품의 값을 깎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년에 교환기를 5000억원 도입 중인데, 10%만 깎아도 500억을 깎을 수 있는 것으로 충분히 가치 있다라는 논리로 설득했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4년만에 첫 교환기 나오게 된다. 240억을 투입해 TDX1 1만회선 개발에 성공 후 560억원을 추가로 투입해 2만회선 용량의 TDX2 제품을 개발하는 등 우리나라 IT산업 발전을 이끄는 계기가 됐으며, 이후 세계 최초의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CDMA)이동통신 국산화와 상용화로도 이어진다.
오 전 부총리는 "TDX프로젝트의 의미가 개발도상국에서 정부가 어디까지 주도하는 게 좋으냐에 대한 모범답안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당시 경쟁관계에 있던 삼성, 금성, 대우, OPC 등 4대 전자회사들을 정부가 한데 모아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다. 정부 지원은 초기 240억원에서 560억원까지 추가로 투입됐지만 이후 10배 이상 이익을 거뒀다. TDX 프로젝트는 자금을 투입하면 반드시 산출된다는 확실한 R&D 프로젝트로의 개념을 과학자들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에릭슨의 기술이전과 관련한 비화도 소개했다. 교환기를 도입하기 위한 해외 수입 업체를 결정하기 전에 상대 회사에 대해 모두 조사를 하는데, 이 때는 서로 장비를 팔기 위해 기술을 다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한 반도체 회사의 경우 기술을 모두 주겠다고 했는데 이쪽이 준비 안되니 못 받아온 적도 있었다. TDX프로젝트가 한창 진행중일 때 당시 필요하던 교환기에 대해 에릭슨과 협상에 들어갔다. 당시 3~4개 업체들이 장비를 납품하기 위해 경합하던 상황으로 에릭슨에게 핵심기술을 요청했었다.
"에릭슨 회장은 1시간을 고민하더니 결국 사인하더군요." 이후 에릭슨의 기술은 TDX 성공에 큰 밑바탕이 됐다. 이 과정에는 회사를 결정하기 전에 상대 회사에 대해 모두 조사를 하는 치밀함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그는 "현재 아프리카 르완다와 베트남, 캄보디아 등 개발 도상국들이 TDX 개발 프로젝트를 국가주도 표본으로 보고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TDX 개발의 신화는 향후 CDMA 개발 과정에까지 이어졌다. TDX 국산화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통신 핵심기술과 장비는 모두 국내 기술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던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 미국의 벤처기업 수준에 머물러 있던 퀄컴이 지니고 있던 혁신적인 기술인 CDMA를 최초로 실현하고 관련 기술을 국산화, 이동전화 서비스를 저렴하게 공급해 통신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삼성, LG 등 대기업들 역시 당시 모토로라에 한참 밀려 있었지만, CDMA 개발과정에서 터득한 휴대폰 제조 기술을 통해 해외에 수출할 수 있었고, 현재는 수출 효자 상품이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 대기업들끼리 협력하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현재는 경쟁이 워낙 치열해지다보니 각자의 길을 가는 경향이 강하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리=박지성기자 jspark@
사진=김민수기자 ultrarti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