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용어 사용 때 정확한 표현 필요
'불가역' 일본식… '비가역'으로 써야
'불가역' 일본식… '비가역'으로 써야
![[이덕환의 과학세상] (545) `불가역`과 `비가역`](http://contents.dt.co.kr/images/201601/2016012502100976650001[1].jpg "[이덕환의 과학세상] (545) `불가역`과 `비가역`")
정부가 우리의 자존심이 걸린 중차대한 외교 현안을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불가역'은 단순히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의 일상 어휘가 아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불가역은 화학과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전문 어휘인 '비가역'과 동의어다. 외교 협상에서 과학 분야의 전문 어휘가 등장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 과학자들은 '불가역'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한화학회의 '화학술어집'이나 한국물리학회의 '물리학용어집'에서는 '불가역'이라는 어휘를 찾을 수 없다. '불가역'은 일본과 중국의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전문 어휘다. 우리는 '비가역'이라는 어휘를 쓴다. '비가역'이 과학자들만 사용하는 어려운 전문 어휘도 아니다. 오히려 고등학교 화학 교과서에도 소개될 정도다. 우리 정부의 대표가 그런 정도의 과학 상식을 무시하고 일본 대표의 어휘를 무심하게 받아들여 발표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어차피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우리에게 '불'(不)과 '비'(非)의 차이 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불'을 쓰는데 우리만 '비'를 쓰겠다고 고집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질 수도 있다. 오히려 괜한 고집으로 한자 문화권에서 우리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지적과 우려는 화학이나 물리학 분야의 과학자들이 고민할 문제이지 우리 과학자들의 선택을 무시하는 명분이 되지는 못한다.
우리가 '불가역' 대신 '비가역'을 쓴 것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일이 아니다. 해방 이후 화학과 물리학 분야의 모든 교재와 학술논문에서 그렇게 써왔다. 우리의 자존심이 걸린 민감하고 중대한 협상에 나선 외교 당국이 그런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낯선 일본의 어휘를 무작정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다.
'비가역'이라는 어휘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양국의 합의가 '최종적'이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에 적절한 것도 아니다. '가역'(reversible)과 '비가역'(irreversible)이라는 어휘는 최종 결과가 아니라 변화 과정의 특성을 설명하는 어휘다. 본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변화는 '가역적'이고, 그렇지 않은 변화는 '비가역적'이다. 그래서 화학과 물리학에서는 가역과 비가역을 변화·반응·과정을 수식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변화의 결과를 구분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외교 협상에서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가역이나 비가역으로 구분할 수는 있겠지만 합의의 결과를 그렇게 구분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과학에서 사용하는 전문 어휘를 외교 협상이나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과학의 어휘가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서 널리 활용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 어휘의 활용으로 우리의 생각과 인식의 범위를 크게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열역학의 핵심 어휘인 '에너지'의 경우가 그렇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에너지'는 오늘날 누구나 흔히 사용하는 어휘로 자리를 잡았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엄밀한 과학적 의미가 변질되어 불필요한 혼란을 부추기기도 한다. '에너지'의 경우가 그렇다. 에너지가 화석연료와 같은 '에너지원(源)'이나 전기·수소와 같은 '에너지 전달수단'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에너지를 절약하자는 주장이 화석연료 대신 전기를 쓰고, 전기·수소 자동차를 개발하자는 주장으로 잘못 이해된다. 불연속적인 양자 상태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이를 뜻하는 '양자 도약'이 경제학에서는 '대(大)도약' 또는 '대약진'의 뜻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가역변화에서 나타나는 '평형'(equilibrium)을 일상적인 '균형'(balance)으로 오해하기도 하고, 소듐(나트륨)이나 포타슘(칼륨)이 녹아있다는 뜻의 '알칼리'를 수소 이온 농도가 낮은 '염기성'으로 잘못 이해하기도 한다. 어쨌든 일본과의 협상에서 '불가역'은 '비가역'으로 썼어야 했다.
이덕환 서강대 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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