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APEC 의장국 맡은 한국, 제주서 한미 고위급 회담
안덕근-그리어- 재회…협상 테이블 재가동
전문가 "정치 여건상 속도보다 실익…서두르지 말 것”
제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장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16일 국내 특수선 양강인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대표와 비공개 면담을 갖기로 해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한미 양국이 7월 '줄라이 패키지' 타결을 목표로 실무 협의를 이어가는 가운데 K-조선이 관세협상의 첫 단추를 꿰는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그리어 대표는 이날 군함 및 상선 건조와 MRO(보수·수리·정비)를 포함한 한미 조선업 협력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중국의 최대 경쟁국이자 세계 1위 경쟁력을 지닌 한국과의 협력을 강조해온 만큼 향후 '관세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모텐텀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특히 그리어 대표가 방한 전 두 업체에 별도로 면담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져 한미 조선업 협력이 얼마나 구체화돼 통상 협상에서 시너지를 낼지 주목된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이날 그리어 대표와 얼굴을 맞댄다. 지난 '2+2 통상 협의' 이후 한 달 만에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됐다. 관세 협상의 세부 의제가 윤곽을 드러낼지 이목이 쏠린다. 전문가들은 회담에서 관세 협상의 구체적 진전이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면서, 미국 정부의 유예 기간에 쫓기기보다는 실익 중심의 전략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회의는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이 의장으로, 미국·중국·일본·호주 등 21개 회원국 통상장관과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경제협력개발기구(OECD)사무차장 등이 참석한다. 급변하는 글로벌 통상 환경 속에서 주요 경제체 통상 분야 장관급이 모이는 첫 다자 협력의 장이다. 무역·투자 자유화, 원활화 등 다양한 통상 이슈와 역내 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할 방침이다.
산업부는 2025년 APEC 정상회의 주제와 연계해 △무역원활화를 위한 AI 혁신 △다자무역체제를 통한 연결 △지속가능한 무역을 통한 번영이라는 주제로 3개 세션을 구성했다. 하지만 외형적 의제 보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부과한 기본관세 10%에 국가별 차등을 더한 25% 상호관세 인하를 논의하기 위한 한미 고위급 양자회담이 중요하다.
한미는 오는 7월 8일까지 '줄라이 패키지' 협상을 마무리할 계획을 밝혔으나 그동안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해왔다. 당초 양국은 관세·비관세, 경제안보, 투자협력, 환율 등 4개 분야에 작업반을 구성해 세부 의제를 조율하려 했다. 하지만 여러 국가와 동시에 협상 중인 미국의 사정을 고려해 작업반 구성 대신 분야별 순차 협의 방식으로 전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 장관은 양자회담에서 25% 상호관세 면제와 자동차·철강·알루미늄 관세 인하를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고, 조선·에너지 등 산업 협력 방안을 함께 논의하면서 협상력을 높일 것으로 보인다. 반면 미국 측은 방위비 분담금 증액,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 제한 완화 등 비관세 장벽에 대해 협상을 요구할지 주목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영국에 이어 관세 정책의 최대 표적이던 중국과도 협상에 합의한 점에 비춰 한미 간 세부 의제들이 정리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번 2차 고위급 회담에서 관세 협상 관련 세부 논의가 기대만큼 빠르게 진전되긴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통상정책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인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우리 대표 입장에서도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어렵고, 정치적 여건을 감안할 때 그리어 대표가 방한하더라도 당장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면서 "미국 USTR도 18개국과 동시에 협상을 진행 중이기 때문에 협상 결정이 제한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허 교수는 "한국은 FTA 체결국이라는 점을 다른 국가들과 차별화된 협상 지점으로 삼아야 한다"며 "중요한 통상 협상을 앞둔 만큼 한미 양국이 일관된 정책 방향을 내놓아야 향후에도 혼선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성대 한국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이 협상 속도를 언급한 것을 보면, 미국이 조속한 타결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7월 8일까지 모든 것을 완벽히 마무리하려 하기보다 실익을 따져가며 협상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