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자동차 관세에 반도체 보조금 삭감, 여기에 최근 급락한 환율까지 더해지면서 한국 수출의 투 톱 격인 자동차와 반도체 업종에서만 수조원대의 비용을 더 부담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현대자동차·기아의 경우 환율 하락에 더해 가격 동결 또는 인센티브 인상분을 떠안을 경우 수천억원의 영업이익 감소가 우려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기존 약속된 10%의 보조금이 4%대로 줄어들 경우 현지 공장 건설에만 조단위의 비용이 추가로 들어간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보조금 정책이 지정학적 압박 수단으로 쓰일 수 있는 만큼, 범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 구축을 통해 대응 전략을 한층 정교화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車값 고민 현대차…환율·인센티브 압박까지
8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는 지난 2일부터 미국 내 차량 가격 인상을 놓고 현재까지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 전기차 전문지 일렉트렉은 최근 보도에서 "현대차는 2일부터 차량 가격을 인상할 계획이라는 소문을 부인했다"고 전했다.
앞서 호세 무뇨스 현대차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4월초 "6월2일까지 두달 간 모든 라인업(제네시스 포함)의 차량 가격을 인상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이와 관련해 지난달 말 "모든 차종의 가격을 소폭 올리기 위해 준비 중"이라며 "권장 소매가격을 1% 인상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미 폭스바겐, 포드, 스바루, 메르세데스 벤츠 등은 현지 차량 인상을 발표한 상태다. 현대차는 올 1분기 미국 수출을 대폭 늘린 만큼 재고를 확보해놨지만, 수입차 관세가 적용된 4월 이후 수출 물량의 경우 차량 인상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만큼 관세를 부담해야 한다.
지난달부터는 자동차 부품에도 25% 관세가 적용되고 있다. 유진투자증권은 부품 관세로 현대차·기아의 미국 생산 원가가 늘어나 작년과 유사한 수준의 대미 수출이 유지될 경우 양사의 총 연간 관세 부담은 각각 5조9000억원, 4조5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 바 있다.
여기에 환율 압박도 거세다. 서울외국환중개에 따르면 원달러 평균 환율은 올 1분기 평균 1452.66원까지 치솟았지만 이후 급락세를 보이며 지난달 28일엔 1365.00원까지 내렸다. 올해 고점(4월10일 1482.90원) 대비 8%나 떨어졌다.
현대차는 올 1분기 기준 원달러 환율이 5% 하락시 1595억원,기아는 10%가 하락시 863억원의 외화환산 손실을 입는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현대차·기아는 올해 초 강달러 기조에 각각 6010억원, 3640억원의 영업이익을 각각 올렸는데, 올 1분기 대비 수익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차량 가격을 올릴 경우 일정 부분 관세·환율 부담은 상쇄할 수 있지만, 대신 인센티브 부담이 커질 수 있다. 미 자동차 수요가 침체된 가운데, 경쟁사마다 관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가격 전략에 들어간 만큼 경쟁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올 1분기에 현대차는 인센티브를 포함한 믹스(고부가 수익구조) 구조에서 4160억원, 기아는 인센티브 부문에서 4440억원의 영업손실을 각각 입었다.
◇삼성전자, 보조금 4조 줄 수도…"범정부 컨트롤타워 필요"
여기에 보조금을 약속한 바이든 전 정부를 믿고 현지 투자를 단행했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종은 공장 건설에만 5조원 가까운 추가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된다. 이와 관련,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최근 미 상원 세출위원회의 청문회에서 "투자액의 10%는 지나치게 관대하다"며, 적정 보조금 규모를 4% 이하로 제시했다.
삼성전자는 바이든 정부 시절 텍사스주 테일러에 총 370억달러(약 51조원)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건설하기로 하면서 미 상무부로부터 보조금 47억4500만달러(약 6조5000억원),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38억7000만달러(약 5조3000억원)를 투자하면서 최대 4억5800만달러(약 6300억원)의 보조금을 약속받았다. 모두 투자액 대비 10% 수준의 보조금 규모다.
하지만 보조금이 4% 수준으로 줄어든다고 가정하면 삼성전자가 받는 혜택은 14억8000만달러(2조1000억원), SK하이닉스는 1억5500만달러(2100억원)로 각각 줄어든다. 약속된 금액보다 각각 4조4000억원, 4200억원 가량의 보조금을 받지 못하는 셈이다.
재계에서는 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 구축을 통해 양자 협상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수출 산업의 고도화, 기술 자립도 제고, 환율·통상이슈에 민감하지 않은 내수 기반 확대 등 중장기 전략이 병행돼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관세 부과 확대'와 '보조금 제한'은 단순한 경제정책을 넘어선 지정학적 압박 수단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크다"며 "전략산업 보호를 위한 범정부 컨트롤타워를 구축해 관계 부처간 유기적인 통상 대응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관세 면제나 유예 조치를 협의할 수 있는 외교적 협상 역량이 중요하고, 동남아, 유럽, 중동 등 대체 시장을 확대해 특정 국가 의존도를 줄일 필요가 있다"며 "미국의 칩스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대응해 국내 기업에 대한 유사한 지원정책을 마련하는 등 비교역적 불이익을 최소화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